Xp
NBA Maniazine
/ / / /
Xpert

NBA 규칙의 역사 (1946 ~ 1960)

 
14
  1674
Updated at 2017-01-16 02:21:00

출처 : http://www.nba.com/news/officiating
NBA 최초의 룰부터 16-17 시즌의 규칙변화 모두가 정리된 상당히 방대한 양의 자료입니다.

느바매니아 글중에 선수의 기록이나 사건사고에 대한 좋은 글들은 많은데 생각보다 규칙에 대한 글들은 잘 없는 것 같아서 작성해보게 되었습니다. 매니아에 처음 올리는 '매니아'진인 만큼 필력이나 번역실력, 가독성 부분에서 엄청난 저퀄리티를 뿜어내니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번에 전부 번역해서 올리기는 힘들어서 (번역하면서 자료찾고 따로 당시 규칙이나 상황에 대해 공부해봐야 하다보니...)  대략 10~15 시즌씩 나눠서 글을 작성하게 될 듯 합니다.




● NBA 최초의 룰
- 60경기의 스케쥴로 짜인 시즌.
- 경기시간은 48분.
- 득점에 성공하면 실점한 팀이 공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다.
- 지역수비 허용.
- 각 팀은 최대 12명의 선수를 기용할 수 있다.
- 개인파울은 최대 5 개.





● 시즌별 규칙 변화


1946-47
- 더 이상 지역수비를 사용하지 못하게 됨.



1947-48
- 개인파울 제한이 5개에서 6개로 상승.
- 팀당 최대 기용가능 선수가 12명에서 10명으로 축소.



1950-51
- 팀당 최대 기용가능 선수가 11명이었다가 시즌 도중 10명으로 축소.
- 시합종료 3분 전부터 일어나는 모든 파울에는 점프볼을 실행한다.
- 시합종료 3분 전부터 자유투가 성공된 다음엔 점프볼을 실행한다.
점프볼은 파울한 선수와 파울당한 선수 둘이 합니다.
이렇게 시합종료 N분전부터 나온 파울상황에 모두 점프볼을 하는 이유는 고의적인 파울작전과 경기가 거칠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라고 합니다.


1951-52
- Lane을 6피트에서 12피트로 넓힘.
 농구코트에서 Lane이라 하는 것은 그림에 표시된 부분입니다.


1946년 최초의 NBA 당시 농구코트의 모습입니다. 좌우로 얇은 Lane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952-53
- 이제 'late-game free-throw rule'에 의한 점프볼은 파울당한 선수와 그 선수를 수비하고 있던 선수가 합니다.
'late-game free-throw rule'은 1950-51 시즌의 경기종료 3분전부터 실행되는 그 규칙입니다.
(late-game 이란 경기 종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을 말하는데, 앞으로 가끔 언급되는 용어이니 기억해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파울당한 선수와 파울한 선수가 점프볼을 하는 것에서 변경된 것으로, 키 큰 선수가 고의적으로 작은 선수에게 파울할 때 얻는 이점(예: 센터가 포인트가드한테 파울해서 점프볼에 이득을 취함)을 없애기 위함입니다.


1953-54
- 쿼터당 파울 수를 2 개로 제한하는 규칙 추가 : 해당 쿼터에서 선수가 세 번째 파울을 범하면 쿼터가 끝날 때까지 선수는 벤치로 가야 한다.
 이 규칙은 late-game 상황에서 생기는 잦은 파울을 예방하기 위한 용도로 제정되었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폐지됩니다.


1954-55
- 24초의 공격제한시간이 생김.
- 각 쿼터당 팀이 범하는 여섯 번째 파울부터는 자유투가 주어짐.
서로를 위해 만들어진 두 규칙입니다.
점수차를 좁히기 위해 추격하는 팀 입장에서는 고의적인 파울을 할 필요가 없어졌죠. 어찌됬건 이제부터는 24초 안에 상대팀의 공은 자신들의 것이 되니까요. 게다가 파울 수가 쌓이면 상대방에게 자유투를 주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더더욱 공격권을 가져오기 위한 용도로 파울하는 것은 상당히 비효율적인 방법이 되었습니다.

경기가 자주 끊기고 루즈해지는 것, 그리고 특정 상황에서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득을 보는 것을 막기 위한 NBA의 노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 'present two-minute rule'이 폐지됨.
 'present two-minute rule'은 1952-53 시즌에 개정되기 전의 'late-game free-throw rule' 룰과 같습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경기종료 2분전부터 시행된다는 점이었습니다.
- 백코트에서 벌어진 파울에 대해서는 자유투 2구의 벌칙을 준다. - 파울한 선수가 파울제한을 넘겼다면 3구를 주며, 해당 자유투에서 선수는 최대 2점을 득점할 수 있다.
The penalty for a backcourt foul became two shots – three to make two if you are over the limit.
이게 원문입니다만 제가 제대로 번역한건지 모르겠네요... 혹시라도 정확하지 못한 정보를 전해드렸을까봐 미리 사죄의 말씀 올립니다
- 오펜스 파울은 바이얼레이션과 같은 방식으로 벌칙을 집행한다.
오펜스 파울이 발생해도 자유투는 주어지지 않으며, 대신 수비팀이 공격권을 가져갑니다.
그렇다고 개인파울제한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오펜스파울은 개인파울로 기록됩니다.


1958-59
- 더블 파울이 발생하면 각 선수에게 퍼스널 파울이 기록되며, 경기는 양 팀의 센터가 코트 중앙에서 점프볼을 하는 것으로 재개된다.
- 오펜스 파울(볼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팀의 선수가 범한 파울)에 대한 벌칙은 다음과 같다 :
A. 퍼스널 파울이 기록되며 상대팀이 공격권을 가져간다.
B. 4쿼터나 연장전에서 발생한 오펜스 파울이 팀의 7번째(혹은 그 이상의) 파울이었다면 파울에 대한 처벌은 다른 퍼스널 파울과 동일하게 처리한다.



1959-60
- 공격권을 가진 팀이 볼을 프런트코트로 운반하면 수비자는 상대방을 수비하려는 목적 없이 'key'에 3초 이상 머무를 수 없다. 이 바이얼레이션에 대한 처벌은 테크니컬 파울의 자유투 벌칙과 동일하다. 수비팀의 자유투 이후 공격팀은 공격을 재개한다. 
'key'는 지금의 페인트존과 같은 곳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처음 NBA가 출범했을 때 (현)페인트존의 본래 형태는 열쇠와 같은 모양이었기에 붙은 이름입니다.(1951-52 시즌 부분 참고)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윌트 채임벌린의 데뷔시즌이었던 1959-60 시즌입니다. 이 시즌에 생긴 3초룰을 비롯해서 앞으로 점점 윌트 맞춤형 규칙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6
Comments
3
Updated at 2017-01-16 09:20:19

lane을 6피트에서 12피트로 늘린 것은 바로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의 조지 마이칸 때문이었죠. 40년대말부터 마이칸이 강력한 포스트 플레이로 3년 연속 득점왕을 독식하며 그야말로 리그를 씹어먹었고, 그의 막강한 골밑 공격이 경기의 재미를 떨어뜨린다는 일각의 비난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3연패 시절 샤크 이상의 영향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lane의 넓이를 두 배로 늘여서 마이칸의 고유 무브인 "마이칸 드릴"의 활동반경을 줄여버렸죠. 그 결과 마이칸은 더이상 득점왕에 등극하지 못했지만, 하이-포스트에서 뛰어난 피딩으로 동료들의 득점을 늘려주면서 미네아폴리스는 룰 개정 후에도 3번 더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다음에 설명하시겠지만, 12피트 레인을 한 번 더 늘린 인물이 바로 체임벌린이구요. 마이칸과 체임벌린은 한 개인의 위력으로 리그의 룰마저 변경시킨 그야말로 전설적인 빅맨들이죠.


아, 그리고 59-60시즌에 생긴 디펜시브 3초 룰은 체임벌린과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습니다. 이는 지역방어를 허용하지 않는 NBA에서 지역방어를 더더욱 분명하게 금지시키기 위해 적용시킨 룰이죠. 페인트존에 수비수를 세워놓는 것은 여러 지역방어들의 기본 세팅인데, 그 전에는 지역방어를 금지한다고는 했으나 따로 시간 제한 규정이 없었기에 교묘하게 페인트존에 수비수를 세워놓으면서 사실상 지역방어를 쓰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예 페인트 존에 3초 이상 머무를 수 없게 하고, 이를 위반하면 페널티를 부과하는 디펜시브 3초 룰을 신설한겁니다. 이는 지역방어 방지와 관계되지, 체임벌린같은 강력한 센터들을 견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비자 3초 룰은 체임벌린같은 센터를 도와주는 룰이죠.)


흔히 알려진 오펜시브 3초룰은 이미 1930년대에 NCAA에서 도입된 룰입니다. 그런데 항간에는 조지 마이칸이나 윌트 체임벌린 때문에 3초룰이 생겨났다는 오해가 많았죠. 골 텐딩도 마찬가지로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이미 1944년에 NCAA에서 도입된 룰이죠. (골 텐딩은 조지 마이칸과는 연관이 있긴 합니다. 당시가 바로 마이칸이 대학 재학 중이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근데 단지 마이칸 1인 뿐만 아니라 당시 대학 무대에 밥 컬랜드, 돈 오튼, 해리 보이코프 등 6-10을 넘는 여러 장신 센터들이 있었고, 이들 모두가 림 위로 미리 공을 쳐내는 플레이가 가능했기에 생겨나게 된 룰인거죠.)

WR
Updated at 2017-01-16 10:18:50

나름 정확한 정보라 생각했었는데 인터넷이라고 100% 신뢰하면 안되겠네요
좋은댓글 감사합니다. 그러고보니 디펜시브 3초룰에 대한 규정인데 제가 뜬금없이 윌트를 소환했네요! 새벽에 글쓰면서 정신이 나갔나봅니다. 집에 돌아가면 수정해야겠네요.

2017-01-16 13:20:01

마이칸 드릴 연습할때 무슨뜻인가 생각했었는데 선수이름이였군요~

꽤나 대단했던선수같은데 체임벌린만큼 유명하지 않아서 오늘 처음 알게됬네요

 

2017-01-16 13:29:37

네, 4~5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선수기에 많은 분들의 뇌리에선 잊혀졌으나, 그야말로 40년대 후반~50년대 전반의 10년을 지배하다시피 한 막강한 센터였습니다.


그가 소속된 팀은 그 기간동안 7차례 우승(NBL 2차례, NBA 5차례)을 차지했으며, NBA에서만 3년 연속 득점왕에 7년의 커리어 동안 5번의 우승에 모두 주역이었죠. 그 당시에는 MVP를 따로 시상하지 않았기에 시즌 MVP가 없어서 평가절하되는데, 40년대 후반에는 그야말로 리그를 씹어먹던 절대적인 강자였기 때문에 최소 3차례, 최대 4~5차례 시즌 MVP를 차지했어도 무방할 정도의 활약을 펼쳤죠.


골밑에서 그가 자리잡고 공을 받으면 상대 입장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야말로 3연패 시절의 샤킬 오닐에 못지 않은 포스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거기에다가 영리함과 승부근성까지 갖추고 있었죠.


70여년 후인 요즘 선수로 치더라도, 부상당하지 않는 니콜라 페코비치의 피지컬과 힘, 앤드류 보것의 터프함과 영리함을 두루 갖춘 레벨의 선수입니다. 이런 급의 선수가 40년대에 출현했다니 그야말로 농구계를 초토화할 수 밖에 없었죠. 마이칸으로부터 이른바 "농구는 센터 놀음"이란 말이 생겼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2017-01-16 13:34:52

상세하고 친절한답변 감사드립니다

2017-01-17 12:05:37

좋은 글 잘 봤습니다. 

min
70
7629
04:28
atlbkn
39
5912
24-04-13
por
66
10793
24-04-12
hou
31
10261
24-04-08
orl
42
7786
24-04-10
dalsac
47
8173
24-04-05
dal
56
19103
24-04-04
gswind
88
10934
24-04-02
hou
62
11086
24-03-23
bos
125
31138
24-03-18
atlgsw
91
22925
24-03-18
bosden
59
7741
24-03-16
den
125
26053
24-03-14
lal
44
8841
24-02-24
den
92
19178
24-02-20
dal
81
16760
24-02-17
dal
79
9182
24-02-06
bos
54
6358
24-02-15
dal
72
11754
24-02-14
검색 대상
띄어쓰기 시 조건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