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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의 다이내스티(Dynasty)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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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9 00:50:05

프로농구가 본궤도에 진입하기 전인 초창기 10년을 제외하면 NBA에는 두 번의 다이내스티(Dynasty)가 있었습니다. 빌 러셀을 주축으로 한 1960년대의 보스턴 셀틱스와 마이클 조던을 주축으로 한 1990년대 시카고 불스입니다. 셀틱스와 불스의 다이내스티는 다른 팀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감독과 주축 선수들이 한꺼번에 떠남에 따라 스스로 해체되었습니다.


미국의 대학농구에서도 다이내스티가 있었습니다. 1963년부터 1975년까지의 UCLA Bruins입니다. 그 12 시즌동안 존 우든 감독이 이끄는 UCLA는 무려 10차례 NCAA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우든 감독은 1948년 38의 나이로 UCLA 농구팀 감독에 취임했고, 처음 15년 동안은 UCLA가 전국단위가 아닌 퍼시픽 8 컨퍼런스의 강자 자리를 굳히는 데 주력했습니다. 우든 감독의 UCLA는 1963년에 학교 역사상 최초로 NCAA 챔피언에 올랐고, 그 다음해인 1964년에는 30전 전승으로 NCAA 챔피언 자리를 2연패했습니다. 그 직후 루 알신도어(카림 압둘자바)가 UCLA에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 NCAA 규정은 1학년생이 학교대표(Varsity)팀으로 뛰는 것을 금지했기에 알신도어는 학교 대표에 합류하지 못했고, 그 해 UCLA는 퍼시픽 8의 우승도 놓쳤고, 전국대회에서는 더욱 저조한 성적을 거뒀습니다.


루 알신도어는 2학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학교 대표로 뛰면서 3년 연속으로 UCLA를 NCAA 챔피언에 올려놓았습니다. 슈퍼스타 알신도어가 졸업한 1969-70 시즌에 UCLA는 컨퍼런스에서 두 번 패했지만 퍼시픽 8 컨퍼런스 우승은 물론 NCAA 챔피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 직후 빌 월튼이 UCLA에 입학했습니다. 빌 월튼도 NCAA 규정과 UCLA의 전통에 따라 1학년 때 학교 대표로 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UCLA는 또 다시 NCAA 챔피언 자리를 지켜 5년 연속 전국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빌 월튼은 2학년이던 1971-72 시즌에 UCLA 대표팀에 합류했습니다. 그의 동기 키스 윌크스(자말 윌크스)도 월튼과 함께 Varsity Team에 들어왔습니다. 빌 월튼과 키스 윌크스의 UCLA 대표팀은 2년 연속 30승 무패를 거두며 NCAA 타이틀 7연패를 달성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한 조금 자세한 내용을 제가 최근에 두 개의 글로 올린 적이 있습니다. 참고를 위해 두 글을 아래에 링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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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bbs/board.php?bo_table=nbatalk&wr_id=4338583

오늘 글의 핵심은 빌 월튼의 4학년 시절인 운명의 1973-74 시즌입니다.


1973-74 시즌이 개막되기 직전 UCLA는 1971년 1월 30일부터 시작해서 75연승을 이어가던 중이었습니다. 1973-74 시즌에도 UCLA가 연승을 이어갈지의 여부는 농구팬들에게 관심의 초점이었습니다. 전문가들이 꼽은 UCLA의 최대 난적은 3학년생 데이비드 탐슨과 4학년생 장신 센터 타미 벌레슨(Tommy Burleson)을 주축으로 하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NC State)입니다. NC State는 바로 전해인 1972-73 시즌에 27전 전승을 올린 팀이었습니다. 하지만 데이비드 탐슨의 스카웃 과정에서 NCAA의 룰을 어겼기 때문에 NCAA 토너먼트 참가자격을 박탈당해 출전하지 못했고, 1973-74 시즌에는 징계가 풀린 상태였습니다. UCLA와 마찬가지로 전승팀인 NC State도 지난 해 주전멤버들을 대부분 보유하고 있어 UCLA의 연승기록과 NCAA 챔피언 8연패를 저지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팀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1973-74 시즌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73년 12월에 세인트루이스에서 전국 1위 UCLA와 전국 2위 NC State의 대결이 이뤄졌을 때 UCLA는 84-66으로 NC State에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1970년 1월부터 이어져오던 UCLA의 연승기록은 79연승으로 늘어나고, UCLA는 다시 무적의 포스를 보이는 듯싶었습니다. 실제로 UCLA는 그 이후에도 파죽지세의 큰 스코어 차이로 9연승을 달려 1974년 1월 17일에 88연승을 이뤘고, 이틀 후인 1월 19일 노트르담(Notre Dame)과의 어웨이 경기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 시점의 노트르담은 시즌 전승을 달리던 전국 2위의 팀이었습니다. 그리고 노트르담은 1971년 1월에 UCLA에게 마지막 패배를 안겨줬던 학교였습니다. 1971년 1월 노트르담은 오스틴 카(Austin Carr)가 46득점을 올리는 활약으로 UCLA에게 89-92로 승리했었고, 그 이후 1092일 동안 UCLA는 평균 득실차 23.5점으로 88연승을 달렸습니다. 연승 중에 존 우든 감독은 중요한 순간에도 작전타임을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작전타임을 쓰는 것은 상대팀에게 UCLA의 자신감이 떨어졌다는 걸 보여준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1974년 1월 19일 홈에서 UCLA의 89연승을 저지하기로 마음먹은 노트르담은 NCAA 규정이 약화된 틈을 타 신입생이던 애드리언 댄틀리를 주전에 포함시켰습니다. 댄틀리는 그날 큰 활약을 펼쳤고 UCLA가 첫 공격을 시도했을 때 엘보우(elbow)로 빌 월튼의 얼굴을 가격해 코피를 잔뜩 쏟게 했습니다.


하지만 UCLA의 공격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경기시작 즉시 9-2로 달아났고, 전반전 종료 8분을 남기고 UCLA는 33-16으로 크게 리드했습니다. 노트르담의 추격으로 전반을 43-34로 리드한 UCLA는 월튼이 7개의 야투 중 6개를 성공시킨 것을 비롯해 70%의 팀 야투 성공률을 기록했습니다. UCLA는 후반전에도 줄곧 리드를 지켜 종료 3분 30초를 남기고 70-59로 리드했습니다. UCLA의 89연승이 코앞에 다가온 듯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노트르담이 맹추격을 하는 동안 UCLA 선수들은 뭐에 홀린 듯 얼어붙었습니다. 종료 1분을 남기고 노트르담에게 70-69, 1점차로 추격당한 UCLA의 월튼은 우든 감독에게 작전시간 신호를 보냈지만 감독은 작전시간을 거부했습니다. UCLA의 공격은 실패로 끝났고 노트르담은 드와이트 클레이가 29초를 남기고 점프슛을 성공시킴에 따라 71-70으로 역전에 성공했습니다. 경기 시작 후 노트르담의 첫 번째 리드였습니다.


마지막 공격에서 UCLA는 빌 월튼에게 마지막 슛을 맡겼습니다. 그때까지 월튼은 그 경기에서 13개의 야투 중 12개를 성공시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월튼의 슛은 빗나갔고 UCLA는 70-71로 믿겨지지 않는 역전패를 당했습니다. 연승 기록도 88연승에서 끝났고, 전국 랭킹 1위도 노트르담에게 빼앗겼습니다.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패배에 UCLA 팀은 크게 흔들렸습니다. 홈에서 곧바로 펼쳐진 노트르담과의 리턴매치에서 승리해 전국랭킹 1위를 되찾았으나 얼마 후 오리건 주립대학과 오리건 대학에게 연달아 패배했습니다. 1092일 동안 무패행진을 달려오던 팀이 20일도 안 되는 사이에 세 번을 패한 것입니다.


빌 월튼은 농구선수 커리어 내내 5년 선배인 카림 압둘자바(루 알신도어)와 비교되고 있었습니다. 카림 압둘자바는 3년간 UCLA의 주전으로 뛰면서 88승 2패를 거뒀고, 3년 연속 NCAA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빌 월튼은 경기를 지배하는 포스가 카림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가 주전으로 뛰던 2년 반 동안 UCLA는 전승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승부욕이 넘치는 월튼은 88승 2패보다 나은 성적으로 3년 연속 NCAA 챔피언에 올라 카림과 동등한 선수로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래왔습니다. 그런데 팀이 짧은 기간에 세 번 패배한 것입니다. 월튼은 크게 좌절했고, 무릎과 등의 상태가 나날이 악화되었지만 자신의 모든 여력을 팀의 우승에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이후 UCLA는 다시 연승을 이어가 퍼시픽 8 컨퍼런스 우승을 차지했고, NCAA 토너먼트가 열리기 직전에 전국랭킹 2위로 올라섰습니다. 전국랭킹 1위 팀은 다름이 아니라 1973년 12월에 세인트루이스에서 UCLA에게 크게 패한 NC State였습니다. NC State는 UCLA에게 패한 후 전승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1974년 NCAA 토너먼트에서 NC State와 UCLA는 각각의 지역 1번 시드를 배정받았고, 두 팀 모두 지역토너먼트에서 우승하는 경우 Final 4에서 만나는 시나리오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1974년 3월 23일 27승 1패의 전국 1위 NC State와 25승 3패의 전국 2위 UCLA는 NCAA 토너먼트 Final 4 대결에서 만났습니다. 전국랭킹과 전적에서는 NC State가 앞섰지만 전문가와 농구팬들은 UCLA의 우세를 예상했습니다. UCLA는 이미 중립지역에서 NC State를 크게 이긴 바 있었고, 지난해까지 7번을 내리 우승한 학교였습니다. NCAA 토너먼트에서 UCLA가 패배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 같았습니다.


NC State의 핵심은 3학년생 데이비드 탐슨과 4학년생 장신 백인 센터 타미 벌레슨(Tommy Burleson)이었습니다. 서전트 점프 110cm를 기록한 데이비드 탐슨은 코트 위를 날아다녔으며, 각종 매체에서 올해의 대학선수 타이틀을 빌 월튼과 함께 양분하던 슈퍼스타였습니다. 타미 벌레슨은 7’2”의 장신으로 UCLA의 빌 월튼을 철저히 맡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졸업반인 타미 벌레슨에게는 UCLA와 대결에서의 활약이 드래프트 픽의 순위를 좌우하는 팩터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무릎 부상에 시달리던 빌 월튼은 일주일 이상 휴식을 취한 상태여서 좋은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했습니다. 무릎 컨디션이 최악이던 지난해 결스에서 빌 월튼은 22개의 야투 중에서 21개를 성공시키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 적이 있었기에 타미 벌레슨의 활약이 경기에서 가장 큰 변수로 전문가들에게 인식되었습니다. 혹시나 벌레슨이 5반칙 퇴장을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NC State에서는 빌 월튼을 막을 수 있는 선수가 아무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경기에서 빌 월튼은 역시 놀라운 활약을 펼쳤습니다. 타미 벌레슨도 공격과 수비에서 선전했습니다. 키스 윌크스(자말 윌크스)와 데이비드 탐슨도 공수에서 서로와 불꽃 튀는 맞대결을 선보였습니다. 경기는 시종일관 박빙으로 진행되어 35-35로 전반전을 마쳤습니다.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타미 벌레슨이 파울 트러블에 걸린 사이에 UCLA는 14-3으로 달아났습니다. 종료 10분을 남기고 UCLA가 57-46으로 리드했으나 그때부터 NC State는 연속 8득점을 올렸습니다. NC State는 데이비드 탐슨의 레이업으로 종료 4분전에 첫 번째 역전에 성공했고 그 이후 치열한 공방 끝에 65-65 동점을 기록해 연장전에 들어갔습니다.


연장전에서 NC State는 벌레슨의 득점으로 앞서갔으나 곧바로 동점을 허용했습니다. 일진일퇴의 공방 끝에 동점인 상황에서 종료직전 벌레슨이 월튼을 앞에 두고 회심의 슛을 날렸으나 간발의 차이로 빗나가 두 번째 연장전에 돌입했습니다. 두 번째 연장에서 UCLA는 NC State의 연이은 실수를 득점에 연결시켜 종료 3분을 남기고 7점을 앞서며 승기를 잡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NC State는 공격과 수비에서의 리바운드를 거의 독점했습니다. 빗나간 슛을 리바운드 잡아 계속 공격을 이어가 득점으로 연결시키기를 반복한 끝에 NC State는 종료 50초전에 데이비드 탐슨의 뱅크슛으로 76-75로 경기를 역전시켰습니다. NC State는 두 번째 연장의 마지막 3분 동안 UCLA를 13-3으로 압도함으로써 80-77로 극적인 승리를 거뒀습니다.




빌 월튼은 50분 전체를 뛰면서 양팀 최다득점인 29점(야투 13-21, 자유투 3-3)과 18리바운드에 4어시스트를 기록했지만 팀을 승리로 이끄는데 실패했습니다. 월튼을 상대한 벌레슨은 20득점에 14리바운드를 올렸고, 데이비드 탐슨은 팀 최다인 28득점과 10리바운드의 활약으로 팀 승리의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빌 월튼의 꿈과 UCLA의 8연패 도전은 이렇게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NC State와 UCLA의 대결은 지금까지도 대학농구 역사에서 최고의 명승부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아래의 영상은 그 경기에서 두 번의 연장전 하이라이트입니다.

https://youtu.be/rGfIQVS-b2Q

빌 월튼이 NC State와의 경기에서 50분을 풀로 뛰며 무리한 덕분에 그의 무릎 상태는 다시 안 좋아졌습니다. NC State는 이틀 후에 열린 NCAA 토너먼트 결스에서 데이비드 탐슨 등의 활약으로 마켓(Marquette)에 76-64로 승리하고 감격의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해 드래프트에서 빌 월튼은 포틀랜드에게 1번 픽으로 지명되었고, 벌레슨은 3번 픽으로 시애틀에 지명되었습니다. 월튼의 UCLA 동료인 키스 윌크스는 11번 픽으로 골든스테이트에 지명되었고, 자말 윌크스로 개명한 후 76년도 워리어스 NBA 우승의 주역이 됩니다. 그 이후 레이커스로 옮긴 윌크스는 레이커스에서 세 번 우승을 경험하고 은퇴한 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합니다.


빌 월튼이 졸업한 후 맞이한 1974-75 시즌에서 존 우든 감독의 UCLA는 28승 3패를 거두고 NCAA 토너먼트 결승에서 켄터키 대학에게 92-85로 승리해 12년 동안 10번째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 이후 존 우든 감독은 UCLA를 떠납니다. 존 우든 감독의 다이내스티는 1974년 NC State에게 패하고 월튼이 졸업하면서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음 해에 기적같이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UCLA 다이내스티도 무너지는 대신 존 우든 감독의 사임으로 해체됩니다. 그 이후 UCLA는 오배넌 형제 등의 활약으로 1994년에 단 한번 우승하게 됩니다. 2000년대 중반에는 3년 연속 Final 4에 진출하지만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합니다.


1975년에 NC State를 졸업한 데이비드 탐슨은 NBA와 ABA에서 모두 1번 픽으로 지명되는 특이한 상황에 처하지만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런앤건 스타일을 추구하며 몰락해가는 ABA를 택합니다. 데이비드 탐슨은 프로농구 최초로 연봉 100만 달러의 선수이고, 마이클 조던의 어린 시절 우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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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6-10-09 04:26:04

빌 월튼도 프로필 키는 6-11인데 실제 키는 맨발 7-1이더군요. 경기를 많이보진 않았고 카림과 붙은 플옵 한시리즈만 봤는데, 수비와 패스로 게임을 지배한다더니 공격에서도 많이 넣어주는 엄청난 센터였습니다.

WR
2016-10-09 11:43:40

월튼이 보스턴에서 뛸 때 로버트 패리쉬와 신장이 똑같아 보였습니다. 카림이나 제 글의 영상 속 벌레슨보다는 작은 것이 분명합니다. 대학시절 월튼은 중요한 경기마다 공격에서 큰 활약을 보였습니다. 프로에서는 리바운드, 수비, 패스 등의 비중이 더 많았구요. 포틀랜드가 우승할 때에도 득점은 모리스 루카스가 더 많았습니다. 카림과 붙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2016-10-10 23:36:15

잘 읽었습니다

WR
2016-10-11 14:53:49

고맙습니다^^

2016-10-14 00:59:40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당시의 카림은 정말 적수가 없었겠네요.....


뭐 느바가서도 마찬가지였지만....

WR
2016-10-14 22:05:14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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