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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희 선수와 크리스 멀린의 맞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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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0 23:07:39

1982년은 우리나라 남자농구에게 아주 특별한 해였습니다. 그해 11월 뉴델리 아시안게임 남자농구 결승전에서 현대(박수교, 신선우, 이충희, 조명수, 이장수, 박종천, 이원우)와 삼성(박인규, 신동찬, 임정명, 안준호) 소속 선수들이 주축을 이룬 우리 대표팀은 중국을 85-84로 꺾고 금메달을 차지했고, 그것을 계기로 국내에서 남자농구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남자농구의 최고 스타는 현대 소속 실업 2년차의 이충희 선수였습니다.



이충희 선수는 고려대 재학시절 팀의 공식경기 49연승을 이끌며 무적 고대의 신화를 만들었고, 엄청난 스카우드 금액을 받고 졸업과 동시에 현대(현대전자)에 합류해 팀의 국내대회 연속우승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당시 현대팀은 이충희 말고도 박수교, 신선우, 이원우, 이문규, 황유하, 조명수, 이장수, 박종천 등을 보유해 거의 국가대표급의 전력을 보유한 인기 최고의 팀이었습니다.


이충희 선수는 대학시절부터 국내 최고의 슈터로 인정받았습니다. 캐치 앤 슛, 풀업 점퍼, 페이드어웨이 슛, 턴어라운드 슛 뿐 아니라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속공과 더블 클러치 레이업도 그의 장기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런 이충의 선수도 1981년까지 대표팀에서의 활약은 미미했습니다. 우리 대표팀은 중국에게는 매번 지기만 했고, 일본과의 대결에서도 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982년은 만 23세의 이충희 선수의 진정한 전성기가 시작되는 해였습니다. 그해 여름 그 당시까지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 대표팀 중에서 가장 강한 팀이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닌 미국 대학선발팀입니다.


1982년 NCAA 토너먼트 이후 미국농구협회는 전국 대학에서 50명의 최우수 선수들을 선발해 이들을 4개의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1그룹의 12명은 콜롬비아에서 열리는 세계농구선수권대회 대표팀으로 선발되었고, 2그룹의 12명은 유럽 지역을 순방하며 각종 경기를 가졌고, 3그룹의 12명은 대만, 홍콩 한국을 순방하며 각종 국제경기를 치렀습니다. 이들 3그룹 미국 대학선발팀은 대만에서 열린 존스컵 대회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보이며 우승한 이후 1982년 7월 초에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서울 국제초청 남자농구대회에 참가했습니다. 그 이후 한동안 매년 열린 서울 국제초청 남자농구대회는 그 첫해인 1982년 7월에 한국, 미국, 오스트리아, 스웨덴, 뉴질랜드, 대만 등 6개국이 참가했고, 이들 중에서 미국과 스웨덴을 제외하면 모두 국가대표팀이 출전한 명실상부 국제대회였습니다.


이들 중에서 언론의 거의 모든 초점은 미국팀에게 쏠렸습니다. 미국팀은 존스컵에서 우승했을 때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최선을 다해 압도적인 스코어 차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모 실업팀 코치를 맡고 있던 농구인은 TV 인터뷰와 신문 기사를 통해 미국팀이 마음먹고 경기하면 우리 대표팀은 10골을 넣기도 힘들 거라고 단언했습니다. 미국팀은 대학선발 3진이지만 엄연한 대학의 스타플레이어 정예부대였고, 1,2,3진을 구성할 때 인종과 학년별로 안배를 했기 때문에 이들 중에는 훗날 NBA에서 스타플레이어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선수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세인트 존스 대학교 2학년생인 크리스 멀린, 그리고 콜로라도 대학교의 제이 험프리스가 바로 이들입니다.


하지만 당시 자타공인 미국팀의 에이스로 인정받던 선수는 7번을 달고 뛴 워싱턴 대학교의 마이클 브릿(Michael Britt)이었습니다. 경기마다 너무 환상적인 플레이를 보여준 마이클 브릿은 국내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당시 TV 해설을 맡았던 김영기씨는 마이클 브릿이 프로에 진출해서 스타가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마이클 브릿과 함께 스타로 인정받던 선수는 센터를 맡아 자유자재로 덩크슛을 선보이던 토니 코스트너(Tony Costner)였습니다. 미국팀의 특징은 7~8분 간격으로 흑인팀과 백인팀을 번갈아 출장시켰고, 그 중에서 선발로 출장했던 흑인팀은 상대를 시종일관 백코트부터 밀착수비로 밀어붙였습니다. 훗날 LA 올림픽에서 미국 여자팀이 선보였던 전술과 비슷했습니다.


저는 이충희 선수나 박수교 선수가 미국팀을 상대로 얼만큼 활약할 수 있을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이충희 선수가 미국의 장신들을 헤집고 활약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스웨덴의 시합을 보던 중에 희망을 접어버렸습니다. 이충희 선수는 스웨덴 장신선수의 수비에 연거푸 에어볼을 날리는 거였습니다. 점수는 후반이 시작되자 30점차로 벌어졌고, 이후 스웨덴 선수들은 편하게 경기를 풀어 그 정도 점수차로 경기가 끝났습니다. 미국팀은 예상대로 매 경기 상대팀을 하프스코어로 압살하며 연승을 이어갔고, 경기 마지막 날 우리나라와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그 경기는 일요일 낮에 전국에 중계되었습니다. 우리는 슈터 3인방인 박수교, 박인규, 이충희를 주전으로 투입해 분전했지만, 미국에게 44-89로 패했습니다.


미국을 상대로 우리가 넣은 골은 열 개가 넘었지만, 그 해설 말대로 그들이 마음먹고 수비하면 우리는 슛하나 제대로 날릴 수 없음을 확인한 경기였습니다. 이충희 선수는 상대 수비를 제치고도 옆에서 블락 당했습니다. 박수교 선수의 슈팅 폼은 손을 눈앞으로 길게 뻗은 다음에 슛을 날리는 거였는데, 미국 선수들 앞에서 그 폼은 블락해달라고 간청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충희 선수의 페이드어웨이도 등을 제친 상태였지만 슛을 하는 손이 머리 정면으로 뻗혀있기 때문에 너무 쉽게 블락당했습니다. 손을 얼굴 정면으로 길게 뻗어 슛을 하는 것은 당시 우리나라 모든 선수의 공통점이었습니다.


경기가 하프스코어로 진행되자 관중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경기 자체를 즐기고 있었고, 해설자도 미국팀을 칭찬하기에 바빴습니다. 경기 종료 5분쯤 전에 170cm도 안돼 보이는 흑인 선수가 등장해서 더블클러치를 연발하며 묘기를 선보여 관중의 환호를 이끌었습니다.



저는 그 대회 이후 마이클 브릿(Michael Britt)이라는 이름을 잊지 않았습니다. 1989년 미국에 유학 갔을 때 저는 곧바로 이 선수의 근황을 수소문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그는 NBA에서 뛰지 못했습니다. 1983년에 2라운드 픽으로 워싱턴에 지목되었지만 계약이 이뤄지지는 않았고, 그는 졸업 첫해부터 외국에서 선수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니 코스트너도 NBA에 드래프트 되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때까지 지켜봤던 가장 위대한 선수인 마이클 브릿 조차도 선수로 뛸 수 없는 NBA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났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이충희 선수가 NBA에 진출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질문을 받거나 댈러스 매브릭스에서 이충희 선수를 스카웃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냥 가볍게 살짝 웃고 맙니다.


크리스 멀린 선수가 당시 미국 대표팀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미국에 가서야 우연히 알았습니다. 당시 백인 팀에 어떤 선수였는지 알 것도 같았습니다. 크리스 멀린은 1984년 올림픽 대표와 1992년 원조 드림팀 멤버입니다. (한국 남자팀은 1984년과 1992년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당시에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그런 선수가 뛴 경기를 국내에서 두 번 직관했다는 것에 지금도 뿌듯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귀국한 후 우리나라 농구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1982년 서울 국제초청 남자농구대회를 기억하는 분은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자세히 설명하면 그때서야 그런 적이 있었다고 떠올리는 게 다였습니다. 마이클 브릿을 기억하는 분은 아직 한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1982년에 크리스 멀린이 우리나라에 왔다는 걸 아는 분도 아직 한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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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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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0 23:14:38

슬픈 내용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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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0 23:28:04

고맙습니다. 저에게는 농구와 함께 한 애틋한 추억입니다.

2016-09-10 23:37:07

7~ 9살 정도에

우리나라 대표팀이
외국의 키 큰 선수들에게 
패하는 경기를 보고
펑펑 울면서 경기장을 나오던 기억 때문에요.

요즘 올려주시는 
과거 한국농구의 보석같은 글들 고맙습니다.

WR
2
2016-09-10 23:47:20

감사합니다. 저도 남자 국가대표 경기에 대한 좋은 기억은 1982년 뉴델리의 기적 말고는 별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해당 경기 영상을 아래에 첨부합니다.

당시 캐스터의 멘트도 그대로 나오는데, 그때 아나운서들에게 농구의 슛은 딱 두 종류밖에 없었습니다. 원핸드슛과 투핸드슛이요. 남자들은 투핸드슛을 안하기 때문에 모든 슛에 원핸드슛이라는 캐스터의 약식 설명이 뒤따릅니다.

https://youtu.be/ocMf0nRgaK4

2016-09-11 10:08:40

신선우 총재 몸이 참 좋네여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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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1 10:21:23

신선우씨는 대학시절에 계속 센터를 맡았었고, 현대에 입단 후에도 포지션은 센터였습니다. 큰 부상을 당해서 뉴델리 아시안게임 3년전에 은퇴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기적처럼 재활에 성공한 후 대표팀 주전 포인트가드로 부활해 아시안게임 우승의 진정한 주역이 되었습니다. 당시 신선우 선수의 진가를 잘 알고 있던 현대의 방렬 감독이 대표팀을 이끌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신선우 선수는 아시안게임 이후 다시 현대로 복귀해서 팀을 1회 점보시리즈(농구대잔치) 우승으로 이끌고 은퇴했습니다.

2018-08-08 14:43:23

센터은퇴후 포가로 부활한건가요?? 반대의 경우는 그나마 납득하겠지만 황당할 정도네요

2016-09-10 23:46:57

김동광 선수가 아이재이아 토마스와 맞짱 뜬 일도 있죠.

WR
2016-09-10 23:48:35

우리 국대의 미국 전지훈련에서일 겁니다.

2016-09-11 00:06:16

궁금한데 자세히 알수있을까요?

2016-09-10 23:55:05

정말 안타깝네요.


사실 그 때나 지금이나 NBA 와 우리와의 격차는 그다지 좁혀지지 않은 거 같아서 더 슬픕니다..  
WR
1
2016-09-11 00:05:56

미국에게 대패한 다음날 어느 신문에서는 1면에 칼럼을 기재하고, 앞으로 농구는 신장별로 구분을 두어서 경기를 열도록 규칙을 바꿔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썼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해도 우리가 안된다는 것을 아는 게 다른 점이랄까요?


당시 미국 대표팀에 대해 설명이 나온 기사를 찾았습니다. 아래에 링크합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71500209208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7-15&officeId=00020&pageNo=8&printNo=18701&publishType=00020

WR
2
2016-09-11 09:49:55

유튜브에 마이클 브릿의 영상이 있네요.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워싱턴 대학교가 아니라 District of Columbia 대학이었네요. (워싱턴 = District of Columbia 인 것은 맞습니다.) 영상에서 보이는 저런 플레이를 시합 때 그대로 보여줬습니다. 상대팀 수비가 워낙 약한데다가 속공 챈스도 많이 있어서요. 우리나라 관중들은 물론 캐스터와 TV 해설자 모두 저런 플레이는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https://youtu.be/jgTcDaZe8aA

2016-09-11 18:48:02

몰랐던 일을 또 하나 배워가네요. 매번 올려주시는 자료들 정독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09-12 10:50:24

제목..정말 잘뽑았네요..

2016-09-12 11:46:42

이충희는 어쩌면... 했던 제 기대를 박살내는 글이군요....에휴..

역시 nba의 벽은.... 아니 성인남자농구 국제무대의 벽이라고 해야 맞겠군요....;;;
2016-09-12 23:55:45

한국 중공 동영상보고 느낀점은 저때당시는 포인트가드라는개념이랑 스크린플레이가 없네요...

2016-09-13 11:37:23

요즘 포인트가드의 역할이 정립된건 아마 내쉬 이후로 보는게 맞을겁니다. 그래서 내쉬 이전 포가들을 보면 꽤 밋밋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죠.

2016-09-14 03:12:15

전 존스탁턴이라고 생각해요....그전부터 픽앤롤과 지공속공의 조율하는 지휘자라고 생각했거든요 더불어 본인이 더맨이되기도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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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6-09-16 07:40:20

말씀하신 요즘 포인트가드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리그에서의 포인트가드 포지션이 맡았던 비중들을 따져보면 내쉬는 너무 최근 선수네요. 82년도 nba리그부터 내쉬등장전까지 배출되었던 포인트가드들중 현시스템에 기반이 되었던 포인트 가드들은 찾아보면 많이 있습니다. 내쉬와 비슷한 시기에 뛰던 키드나 위에 말씀하신 존스탁턴, 그전의 아이재아 토마스도 있었구요. 특히나 존스탁턴은 해당 포지션의 정석이라 불릴정도인데 역할의 정립이라 칭하기엔 범위가 너무 넓지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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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8 22:57:35

어처구니가 없는 댓글이네요. 포인트가드 개념이 정립된게 내쉬 이후라뇨. 슬램덩크만 봐도 포인트가드의 개념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요. 오히려 최근 포인트가드들은 내쉬하고 다르게 듀얼가드화 되는 추세죠. 웨스트브룩, 로즈, 릴라드, 커리...

2016-09-29 09:28:43

그 듀얼가드를 정립시킨게 내쉬라는 얘기입니다. 요즘 포가 = 듀얼가드죠. 그게 지금 시대에서는 정석이라고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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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9 13:01:15

팀하더웨이, 케빈 존슨 등 그 전에도 많았구요. 내쉬는 듀얼가드로 분류되지도 않아요.

2016-09-29 13:36:28

내쉬는 퓨어포가지만 슈팅력+픽앤롤로 경기를 풀어나갔죠. 요즘 많은 포가들의 경기운영방식이 내쉬랑 비슷합니다. 그리고 이건 저만의 생각도 아닌게

http://www.sbnation.com/nba/2014/10/24/7058739/steve-nash-injury-phoenix-suns-seven-seconds-or-less

이 기사를 보면 내쉬와 피닉스의 런앤건이 수비+아이솔의 농구로부터 픽앤롤-오픈3점과 pace를 강조하는 현대 농구에 영향을 줬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당장에 요즘 듀얼적 성향이 강하다는 포가인 어빙, 릴라드, 커리 하이라이트도 내쉬하이라이트와 비슷하지 하더웨이나 케빈 존슨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남이 쓴 댓글에 다짜고짜 어처구니 없다니 제가 더 어처구니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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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6-09-29 15:17:15

말도 안되는 얘기로 우기시니깐 그렇죠. 처음에 댓글 다신 내용엔 포인트가드의 개념 정립이 내쉬라고 하셨다가 최근 듀얼 가드의 개념 정립이 내쉬라고 하셨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내쉬 훨씬 이전부터 운영형 포가와 듀얼가드(공격형 포가)에 대한 논의는 한참 있었어요. 내쉬 이전에 키드와 스테판 마베리도 그런식으로 비교됐었고요. 좀 우기지 마세요. 진짜. 듀얼가드를 정립시킨게 내쉬라고 했다가 내쉬는 퓨어포가라고 했다가.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내가 이 쓸데없는 논쟁에서 이기려고 키배를 늘리고 있지 않나 생각해보세요. 전 이제 이 댓글 관련해서 안볼꺼니까 리플 달든 말든 맘대로 하십시오.

2016-09-29 15:51:38

처음부터 '요즘' 포가를 내쉬가 정립했다고 했습니다. 제가 언제 포인트가드를 정립했다라고 한적이 있나요....

내쉬는 퓨어포가로 분류되지만 피닉스 선즈에서 그의 슈팅력을 바탕으로한 듀얼적성향을 보여줬고, 그걸 픽앤롤과 엮으면서 새로운 스타일의 포인트가드를 만들었습니다. 그게 현 시대로 듀얼적 성향을 보이는 포가들이 넘쳐나는 시대가 된겁니다.

애초에 포인트가드의 역할을 듀얼/퓨어로 나누는데 요즘 포가들은 딱히 그게 구분이 어렵습니다. 공격 조립부터 피니시까지 많은걸 다 하기 때문인데, 이 포인트가드의 역할의 정립을 내쉬와 피닉스선즈가 정립시킨겁니다. 제가 링크걸어준 기사에도 그렇게 말하고 있고요. 요즘 포가는 듀얼가드라는건 제가 잘못말한걸 인정합니다. 정확히는 듀얼적성향을 보이는 포가라고해야죠.

말씀하신대로 이전의 마버리나 아레나스 처럼 듀얼가드들은 있었습니다만 픽앤롤을 빠른 공격페이스에 녹이면서 현시대의 빠른페이스, 스크린플레이 후 오픈3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공격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쉬가 정립시켰다라고 한거고요.

뭐 이의견에 반박하는건 환영합니다만 제가 제 마음대로 나불거리는것도아니고 기사내용을 근거로 말을하는건데 애초에 얼토당토없다느니 어처구니가 없다느니 하는건 기분이 나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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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6-09-29 19:47:19

한번만 더 댓글 달게요.


님이 쓴 글에 세 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요즘'포가라고 읽고 님이 의도하신 대로 댓글을 다신 분이 한명도 없습니다. 우리가 잘 못 이해한 겁니까. 님이 잘 못 쓰신 겁니까.


 그리고 "요즘 포가는 듀얼가드라는건 제가 잘못말한걸 인정합니다. 정확히는 듀얼적성향을 보이는 포가라고해야죠"라고 쓰셨죠. 그럼 인정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확실히 말씀드리는데 최근의 듀얼적 성향을 보이는 포가 자체도 내쉬가 정립 시키지 않았습니다. 내쉬의 영향을 받은 선수는 있겠지만 정립시켰다는 말은 너무 많이 나간 거 같네요.


내쉬와 최근의 듀얼적 성향을 보이는 로즈, 릴라드, 웨스트 브룩, 카이리 어빙  이 그룹은 판이하게 플레이 스타일이 달라요. 로즈, 릴라드, 웨스트브룩 이런 듀얼 가드들이 내쉬처럼 달리면서 얼리 오펜스를 하면서 팀동료의 공격을 살리는 스타일입니까?


2016-09-29 19:57:26

네, 차라리 처음부터 이런식으로 댓글을 다셨으면 좀 제대로된 대화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위에 디 마일즈님은 '요즘 포가의 정의가 어떤지 모르겠지만'이라고 쓰신걸보니 제대로 읽으셨신걸로 추정됩니다.

전 저 선수들의 픽활용법이 내쉬와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시야가 외곽까지 확장이 안되는 어빙이나 로즈의 경우 내쉬의 패스스킬까지는 못 가져왔죠. 다만 픽을 이용해서 점퍼를 넣을 공간을 만드는건 비슷합니다. 뭐 워낙 정석적인거니까 그럴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칼럼에서도 릴라드가 스크린상황에서 아래에서 내려간 수비수를 보자마자 3점을 던지는건 내쉬의 영향이라고 말합니다.

정립까지는 너무 나갔다고 말씀하시면 그 의견은 존중할 수 있습니다.

2016-09-29 13:44:28

/g2/bbs/board.php?bo_table=maniazine&wr_id=127377&sca=&sfl=wr_subject&stx=내쉬&sop=and&scrap_mode=

추가자료입니다.

2016-09-29 19:46:58

이 글에도 내쉬가 현재 리그를 주름잡는 포인트 가드 그룹의 플레이 스타일에 미친 영향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읽어보신 것 맞으신지요?

2016-09-29 20:00:18

Gabe Mannes가 그의 운동화를 문지를 때, 그게 바로 스티브 내쉬이다. 고란 드라기치가 up-and-under무브를 쓸 때, 그게 바로 스티브 내쉬이다. 토니 파커가 한 포제션에서 연달아 픽앤롤을 3번 할 때, 데미안 릴라드가 스크린 아래로 가는 어리석은 수비수를 보고 슛을 날릴 때, 라존 론도가 안으로 돌파한 후 다시 돌아나오면서 컷인하는 선수한테 침착하게 패스를 할 때, 그게 바로 스티브 내쉬이다. 골든 스테이트가 스몰라인업을 쓸 때, 애틀랜타 호크스가 속공을 할 때, 어디선가 어떤 선수가 트랩 수비를 쇄도해오는 빅맨한테 연결되는 섬세한 패스로 뚫어낼 때, 그 모든 것의 일부분은 스티브 내쉬로 연결될 수 있다. 그의 유산은 크리스 폴, 카이리 어빙, 러셀 웨스트브룩과 리키 루비오 안에 살아있다. 그들 스스로는 그걸 눈치채지 못해도 말이다. 그의 유산은 Gabe Manees와 같은 캐나다의 어린 청년들 안에 살아있다. 이 모든 포인트가드들은 스티브 내쉬가 만들어낸 자유를 만끽하며 플레이한다. 스테판 커리가 말하기를, "내쉬는 새로운 플레이방식을 창조해냈어요. 내가 편안한 방식으로 플레이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NBA의 포인트가드 혁명이 언제 어디서 시작했는지 정확히 집어내는 것은 쉽지 않지만, 1999년 봄의 댈러스를 꼽아볼 수 있다. 도니 넬슨은 피닉스에서 댈러스 매버릭스로 이직했었고, 그의 아버지인 Don Nelson 감독을 설득하여 내쉬를 영입했다. 도니의 판단은 옳았었지만, 그것이 증명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댈러스에서 내쉬의 첫 시즌은 그의 커리어 최악의 시즌이었다. 도니는 내쉬가 왜 계속 슛하기를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 포인트가드입니다. 저는 패스하고 싶단 말이에요. 어쩔 수 없어요"라고 내쉬가 말했다. 1999년 즈음에는, 많은 포인트가드들이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도니의 대답은 "개소리 하지마"였다. "너는 도미넌트한 선수야." 현대농구의 대부분의 코치들과 마찬가지로, 도니는 최고의 포인트가드는 패스를 잘하는 것만큼 슛을 잘 쏴야 하고, 패스와 슛은 서로를 보완하는 능력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3월 24일에, 댈러스는 휴스턴을 상대로 경기를 졌고 내쉬는 야투 1/10을 기록했다. 더크 노비츠키는 내쉬가 성공한 그 한 개의 야투를 아직도 기억한다. "저는 벤치에 있었고, 경기장의 팬들은 끊임없이 내쉬한테 야유를 퍼부었어요. 야유가 제일 심해졌을 때, 내쉬는 최고속력으로 코트를 뛰어가서, 3점슛을 쏴서 집어넣었어요. 그때 '이자식 깡따구가 장난 아닌데'라고 생각했었죠."

노비츠키와 내쉬는 함께 댈러스 프로농구를 부활시켰다. 댈러스는 원래 3팀 트레이드를 통해 두 선수를 영입했었지만, 노비츠키는 드래프트 픽이었고 유럽리그에서 2년을 더 뛰고 싶어했다. 댈러스 프런트는 일단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내쉬를 만난 다음에 결정하라고 노비츠키를 설득하였다. 결국 노비츠키와 내쉬는 같은 아파트의 룸메이트가 되었고, 경기가 없는 날이면 매일밤 HORSE(이거 농구게임인데 한사람이 슛 성공시키면 다른 사람이 그대로 같은 위치에서 슛해야되고... 한국말로 뭐라 그러는지 기억이 안나네요 -_-;;)를 했고, 픽앤롤을 같이 연습하였다.


댈러스는 내쉬를 매우 아끼게 되었지만, 그의 등에 대한 걱정을 떨칠 수 없었고, 결국 2004년에 피닉스가 내쉬를 뺏어갔다. "그때 당시 우리는 어떤 식으로 플레이할지도 전혀 생각 못했었어요"라고 당시 피닉스의 감독 마이크 댄토니는 회상한다. 유럽에서 감독을 할 당시, 댄토니가 감독하는 팀들은 마치 농구경기를 사격연습처럼 대하였다. 서로 간격을 벌리고 3점라인 뒤에 선 다음에 마구 슛을 쏘는 것이다.
"NBA에서는 그런 식으로 플레이할 수 있을지 두려웠어요. 다들 '그렇게 하면 선수들이 죽어나고, 넌 결국 짤릴거야'라고 하더라고요."
그 해 여름 댄토니는 제리와 브라이언 콜란젤로 형제와 만났고, 콜란젤로 형제는 댄토니에게 그가 꿈꿔오던 말을 해줬다. "감독님이 생각하기에 가장 뛰어난 5명을 쓰세요." 댄토니는 당장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를 센터로, 숀 매리언을 파워포워드로 옮겼다. 당시에는 혁명적이었던 스페이싱이 가능한 스몰라인업으로, 내쉬는 그 덕분에 농구의 오펜스를 재창조해낼 수 있었다.

"내쉬는 훌룡한 포인트가드가 탁 트인 코트에서 마음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보여줬어요"라고 댄토니는 말한다. "경기가 폭발적으로 변해요."
결국 그들은 우승에는 실패하였기 때문에, 선즈는 그저 조금은 신기한 7초짜리 B급 팀으로 폄하하기 쉽다. 하지만 그 때의 선즈는 지금 다른 몸으로 새롭게 부활하여 날개짓하고 있다. 끊임없이 픽앤롤을 전개하는 샌안토니오, 골든 스테이트, 애틀랜타, 휴스턴의 경기를 보라. 이들 팀에서 선즈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처음에는 그냥 카오스처럼 보였어요"라고 그랜트 힐은 말한다. "하지만 점차 다른 팀들이 선즈의 스타일을 모방하기 시작했고, 스티브 내쉬는 그것에 제일 많은 기여를 했어요. 예전에는 포인트가드는 공을 받아 하프라인을 넘고 인사이드나 윙에게 패스하기만 했죠. 내쉬는 아예 새로운 방식을 보여줬어요. 팀에 커리나 릴라드, 웨스트브룩, 크리스 폴 같은 선수가 있으면, 그냥 그들에게 팀을 넘겨주면 되는거에요. 몇 개의 세트플레이나, 약간의 구조는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들의 직감을 믿고 맡기는거죠."

Updated at 2018-08-16 16:16:24

내쉬 이전 포가들이 밋밋하다라... 요즘 가드들중 매직이나 스탁턴 패스 반정도라도 따라하는 선수가 있나요? 돌파 슛외엔 기본적인 수비및 패스능력은 지금이 확실히 이전보다 못합니다. 기본적인 엔트리 패스조차 제때 넣어주지 못해 우왕좌왕 하는 경우를 본게 한두번이 아닙니다.

내쉬가 슛, 패스 다 되는 드문 포가인건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그런 선수가 없었던 것도 아니지요. (대신 내쉬에겐 스탁턴이나 키드, 아이재아 토마스급의 수비능력이 없지요)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생각임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하는 것인데, 위에 예시로 든 여러 선수들 코멘트와 일화는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들에게 종종 하곤 하는 립서비스같은 면도 없지 않다고 봅니다.  

2016-09-15 02:20:52

잘봤습니다

근데 본문에서의 김영기 해설위원이란분이
설마 현 총제와 같은분인가요?

WR
2016-09-16 00:34:00

그분 맞습니다. 40년도 넘게 우리나라 농구계를 좌지우지하고 계시죠. 그래도 예전에는 합리적인 면도 많았고 지금같지는 않았습니다.

2016-09-17 14:34:29

 저도 아재인데... 이건 더 아재(?)스런 옛날 이야기군요^^. 저 때가 도대체 언제야 싶은. 재미있게 잘봤습니다. 저도 윗분 말씀처럼 이충희에 대한 환상이 확 깨지는게 슬프네요. 

WR
2016-09-17 16:13:18

어릴적의 기억이 저는 더 또렷합니다. 비슷한 시점에 스페인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로시에게 3골을 내주고 탈락했을 때 너무 심하게 울어서 어머니께 혼났습니다.

2016-09-25 18:01:13

제목만 보고 정말 "맞대결"일까 기대해는데
역시나군요ㅜ
여기 격차는 크군요

1
Updated at 2016-09-26 14:42:25

글쎄요

전 좀 다르게 생각이 되어집니다
농구는 5명이 뛰어다닙니다
우리 팀원이 약하면 그만큼 나에게 상대방의 눈이 매서워지는것이죠
리바운드 해줄 든든한 우리편도 없고 백업 들어오는 수비수까지 살펴야 한다면?
슈터로써 뭘 해야 할까요

전 누구편을 들자는것도 아닙니다
딴지걸자면 사람의 기억이란게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느냐 부터 시작되어지겠군요
손은 눈보다 빠르다고 하는게 한낱 영화대사가 아니라 한사람의 눈이란게 ... 확고하게는 믿을게 못되죠
같은걸 봐도 다르게 생각하고
같은걸 들어도 다르게 느껴지니까요

허재나 신동파나 이충희 같은 사람을 없인 여겨서 우리에게 돌아오는게 무엇인가요?
그렇다고 떠받들자는것도 아닙니다만

복합적인 상황을 전부 고려해야 된다 봅니다

그나마 가장 정확한건 이충희감독?에게 이 때 상황 설명을 들으면 어떨까요
운동으로 어느 지점까지 간 사람들은 변명따위는 쪽팔려서 안하거든요

이런저런것들 모두 한번 사는 개인들의 의견일 뿐 입니다
저도 제 의견을 낸 것이구요
우리네 선수에게 실망하지 말고 농구를 접하셨으면 합니다

1
Updated at 2018-08-09 08:27:08

이충희 선수의 세계선수권 기록을 봐온사람이라서

이충희선수의 기량과 세계무대의 벽을 말하는 부분은 동의하기가 힘드네요.

이충희선수는 86년 세계선수권에서

브라질전 45점 스페인점 19점 파나마전 42점 프랑스전 26점 그리스전 7점을 넣었었습니다. 

 

2018-08-16 16:23:30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저보다도 훨씬 윗연배의 분이신거 같아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합니다. 

다만 이충희선수에 대한 평가를 저때 한경기만 보고 일반화시켜 말하기엔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20대 초반의 나이였던 이충희선수는 아직 실력이 영글지 못했고 성장해가는 시기였다고 봅니다. 

 

제가 직접 보았던 88년 올림픽 경기에서 이충희는 곧 NBA 리거가 되는 드라젠 페테로비치와 블라디 디박을 앞에 두고 과감하게 슛을 던지고 백도어 레이업을 (살짝 더블 클러치) 멋지게 성공시키는 모습을 보여줬었거든요. 수차례 수비수를 따돌리고 스팟업 점프슛을  성공시키기도 했었죠

 

전 허재와 이충희의 최전성기 기량 정도라면, 리그에 적응을 하고 못하고의 문제는 남아있겠으나 NBA에 진출해 벤치멤버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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