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희 선수와 크리스 멀린의 맞대결
1982년은 우리나라 남자농구에게 아주 특별한 해였습니다. 그해 11월 뉴델리 아시안게임 남자농구 결승전에서 현대(박수교, 신선우, 이충희, 조명수, 이장수, 박종천, 이원우)와 삼성(박인규, 신동찬, 임정명, 안준호) 소속 선수들이 주축을 이룬 우리 대표팀은 중국을 85-84로 꺾고 금메달을 차지했고, 그것을 계기로 국내에서 남자농구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남자농구의 최고 스타는 현대 소속 실업 2년차의 이충희 선수였습니다.
이충희 선수는 고려대 재학시절 팀의 공식경기 49연승을 이끌며 무적 고대의 신화를 만들었고, 엄청난 스카우드 금액을 받고 졸업과 동시에 현대(현대전자)에 합류해 팀의 국내대회 연속우승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당시 현대팀은 이충희 말고도 박수교, 신선우, 이원우, 이문규, 황유하, 조명수, 이장수, 박종천 등을 보유해 거의 국가대표급의 전력을 보유한 인기 최고의 팀이었습니다.
이충희 선수는 대학시절부터 국내 최고의 슈터로 인정받았습니다. 캐치 앤 슛, 풀업 점퍼, 페이드어웨이 슛, 턴어라운드 슛 뿐 아니라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속공과 더블 클러치 레이업도 그의 장기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런 이충의 선수도 1981년까지 대표팀에서의 활약은 미미했습니다. 우리 대표팀은 중국에게는 매번 지기만 했고, 일본과의 대결에서도 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982년은 만 23세의 이충희 선수의 진정한 전성기가 시작되는 해였습니다. 그해 여름 그 당시까지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 대표팀 중에서 가장 강한 팀이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닌 미국 대학선발팀입니다.
1982년 NCAA 토너먼트 이후 미국농구협회는 전국 대학에서 50명의 최우수 선수들을 선발해 이들을 4개의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1그룹의 12명은 콜롬비아에서 열리는 세계농구선수권대회 대표팀으로 선발되었고, 2그룹의 12명은 유럽 지역을 순방하며 각종 경기를 가졌고, 3그룹의 12명은 대만, 홍콩 한국을 순방하며 각종 국제경기를 치렀습니다. 이들 3그룹 미국 대학선발팀은 대만에서 열린 존스컵 대회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보이며 우승한 이후 1982년 7월 초에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서울 국제초청 남자농구대회에 참가했습니다. 그 이후 한동안 매년 열린 서울 국제초청 남자농구대회는 그 첫해인 1982년 7월에 한국, 미국, 오스트리아, 스웨덴, 뉴질랜드, 대만 등 6개국이 참가했고, 이들 중에서 미국과 스웨덴을 제외하면 모두 국가대표팀이 출전한 명실상부 국제대회였습니다.
이들 중에서 언론의 거의 모든 초점은 미국팀에게 쏠렸습니다. 미국팀은 존스컵에서 우승했을 때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최선을 다해 압도적인 스코어 차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모 실업팀 코치를 맡고 있던 농구인은 TV 인터뷰와 신문 기사를 통해 미국팀이 마음먹고 경기하면 우리 대표팀은 10골을 넣기도 힘들 거라고 단언했습니다. 미국팀은 대학선발 3진이지만 엄연한 대학의 스타플레이어 정예부대였고, 1,2,3진을 구성할 때 인종과 학년별로 안배를 했기 때문에 이들 중에는 훗날 NBA에서 스타플레이어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선수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세인트 존스 대학교 2학년생인 크리스 멀린, 그리고 콜로라도 대학교의 제이 험프리스가 바로 이들입니다.
하지만 당시 자타공인 미국팀의 에이스로 인정받던 선수는 7번을 달고 뛴 워싱턴 대학교의 마이클 브릿(Michael Britt)이었습니다. 경기마다 너무 환상적인 플레이를 보여준 마이클 브릿은 국내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당시 TV 해설을 맡았던 김영기씨는 마이클 브릿이 프로에 진출해서 스타가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마이클 브릿과 함께 스타로 인정받던 선수는 센터를 맡아 자유자재로 덩크슛을 선보이던 토니 코스트너(Tony Costner)였습니다. 미국팀의 특징은 7~8분 간격으로 흑인팀과 백인팀을 번갈아 출장시켰고, 그 중에서 선발로 출장했던 흑인팀은 상대를 시종일관 백코트부터 밀착수비로 밀어붙였습니다. 훗날 LA 올림픽에서 미국 여자팀이 선보였던 전술과 비슷했습니다.
저는 이충희 선수나 박수교 선수가 미국팀을 상대로 얼만큼 활약할 수 있을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이충희 선수가 미국의 장신들을 헤집고 활약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스웨덴의 시합을 보던 중에 희망을 접어버렸습니다. 이충희 선수는 스웨덴 장신선수의 수비에 연거푸 에어볼을 날리는 거였습니다. 점수는 후반이 시작되자 30점차로 벌어졌고, 이후 스웨덴 선수들은 편하게 경기를 풀어 그 정도 점수차로 경기가 끝났습니다. 미국팀은 예상대로 매 경기 상대팀을 하프스코어로 압살하며 연승을 이어갔고, 경기 마지막 날 우리나라와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그 경기는 일요일 낮에 전국에 중계되었습니다. 우리는 슈터 3인방인 박수교, 박인규, 이충희를 주전으로 투입해 분전했지만, 미국에게 44-89로 패했습니다.
미국을 상대로 우리가 넣은 골은 열 개가 넘었지만, 그 해설 말대로 그들이 마음먹고 수비하면 우리는 슛하나 제대로 날릴 수 없음을 확인한 경기였습니다. 이충희 선수는 상대 수비를 제치고도 옆에서 블락 당했습니다. 박수교 선수의 슈팅 폼은 손을 눈앞으로 길게 뻗은 다음에 슛을 날리는 거였는데, 미국 선수들 앞에서 그 폼은 블락해달라고 간청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충희 선수의 페이드어웨이도 등을 제친 상태였지만 슛을 하는 손이 머리 정면으로 뻗혀있기 때문에 너무 쉽게 블락당했습니다. 손을 얼굴 정면으로 길게 뻗어 슛을 하는 것은 당시 우리나라 모든 선수의 공통점이었습니다.
경기가 하프스코어로 진행되자 관중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경기 자체를 즐기고 있었고, 해설자도 미국팀을 칭찬하기에 바빴습니다. 경기 종료 5분쯤 전에 170cm도 안돼 보이는 흑인 선수가 등장해서 더블클러치를 연발하며 묘기를 선보여 관중의 환호를 이끌었습니다.
저는 그 대회 이후 마이클 브릿(Michael Britt)이라는 이름을 잊지 않았습니다. 1989년 미국에 유학 갔을 때 저는 곧바로 이 선수의 근황을 수소문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그는 NBA에서 뛰지 못했습니다. 1983년에 2라운드 픽으로 워싱턴에 지목되었지만 계약이 이뤄지지는 않았고, 그는 졸업 첫해부터 외국에서 선수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니 코스트너도 NBA에 드래프트 되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때까지 지켜봤던 가장 위대한 선수인 마이클 브릿 조차도 선수로 뛸 수 없는 NBA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났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이충희 선수가 NBA에 진출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질문을 받거나 댈러스 매브릭스에서 이충희 선수를 스카웃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냥 가볍게 살짝 웃고 맙니다.
크리스 멀린 선수가 당시 미국 대표팀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미국에 가서야 우연히 알았습니다. 당시 백인 팀에 어떤 선수였는지 알 것도 같았습니다. 크리스 멀린은 1984년 올림픽 대표와 1992년 원조 드림팀 멤버입니다. (한국 남자팀은 1984년과 1992년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당시에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그런 선수가 뛴 경기를 국내에서 두 번 직관했다는 것에 지금도 뿌듯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귀국한 후 우리나라 농구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1982년 서울 국제초청 남자농구대회를 기억하는 분은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자세히 설명하면 그때서야 그런 적이 있었다고 떠올리는 게 다였습니다. 마이클 브릿을 기억하는 분은 아직 한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1982년에 크리스 멀린이 우리나라에 왔다는 걸 아는 분도 아직 한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슬픈 내용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