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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전설적인 뉴욕의 선수 Malik Sealy 말릭 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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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6-08-29 08:27:24
SLAM잡지 2015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30세에 대부분의 사람보다 많은 것을 이루고 비극적으로 떠난 말릭 실리.

1980년대 뉴욕시의 AAU에서 뛰고자 하는 중고등학생들은 두가지의 옵션이 있었다.  : Bronx Gauchos에서 뛰거나 Riverside Church Hawks에서 뛰거나. 말릭실리, 브롱크스 출신의 날라다니는 (wiry) 포워드는 13세부터 리버사이드 팀에서 뛰었다. 그의 팀원들중엔 뉴욕의 전설들 케니 앤더슨, Brian Reese, Adrian 'Red' Autry등이 있었다. 그 단체는 대단했고 연전연승했다. ; 1987년 열린 Daily news Hoops 토너먼트에서 라이벌 가우초스를 준결승에서 이겼고(실리는 25점 13리바 5스틸 4블락) 결승에서 New Jersey Road Runner을 이기고 도시를 제패했다. 

13년이 지나고 앤더슨, 리스, 오트리 그리고 3000명의 사람들이 같은 빌딩에 모였다. Riverside Church에서 그들은 연습을 위해서도 게임을 위해서도 아니고 장례식을 위해 모였다. 실리는 그 당시 팀메이트였던 케빈 가넷의 24세 생일파티 후에 집으로 운전하던중 음주운전자가 엉뚱한 길에서 과속을 하는 바람에 며칠전 사망한 상태였다. 

'이것이 인생실전이네요..(this is real life)' 라고 정신이 멍한 가넷이 뉴욕타임즈에게 말했다.'리얼 라이프'. 위안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단지 tribute video를 -대부분의 손님은 이미 익숙한-볼 뿐이었다. 말릭실리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모두를 하나로 모았다 - 그것이 팀원이든, 사업파트너이건, 그를 사랑했던 친구과 가족이던..

'나는 그의 주변을 맴돌며 그처럼 되기를 원했어요' 리스가 말했다 '저는 43세이고 아직도 그러고 있지요'.
말릭 실리는 1970년에 태어났고 부모는 Sidney, Ann Sealy였다. 말릭의 아버지, Golden Glove Boxer였던, 는 Malcolm X의 보디가드였다. 말콤x가 1965년 할렘에서 찔렸을때도 일하는 상태는 아니었으나 현장에 있었다. (시드니는 말릭이란 이름을 말콤x의 미들네임에서 따왔다.) 실리의 어머니는 Fasion institude of Technology의 졸업생이었고 평생 패션에 종사하였으며 실리에서 바느질하는 법을 어렸을 때부터 알려주었다.

말릭은 브롱크스의 St. Nicholas of Toletine high school을 다녔고  모든 영역에서 뛰어났다(Flourished).
코트 밖에서는 학생대표이자 표창받는 학생으로 SAT에서 1600점만점에 1200점을 기록했다. 농구에 대한 꿈이 명확해 지기 전에는 그는 베이스 기타를 쳤고 프로음악인이 되고자 하였다. 
'그가 결국 느바 선수가 되었지만, 꼭 성공하기 위해 그 길만 있던 건 아니었어요' 그의 고딩코치였던 john Sarandrea가 말했다. '그가 선택하긴 했지만, 비록 공을 놓았더라고 그는 매우성공적이었을 거에요, 그는 그런 소년이었어요'

하지만 실리는 역시 코트에서도 뛰어났다. 87-88시즌에 오트리(시라큐스로 진학했던), 리스(UNC로 진학)와 함께 31승 1패의 전적을 기록했다. 단 1패는 New jersey St. Anthony(Bobby hurley가 포가를 봤던)였다. 그리고이건 중요한데, 80년대뉴욕 최고 고등학교들은 지금처럼 네바다, 플로리다 같은 곳의 prep school들에게 닦이지(washed)않았다. 뉴욕의 최고가 최고의 고딩팀이었다. Period
'뉴욕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려주자면' ..밤에는 소방관으로 낮에는 톨러타인의 코치로 일했던샌안드레아가 말한다. '우리 리그에 속했던 Cardinal Hayes에는 자말 매쉬번이 뛰었죠. 그는 또 하나의 굉장한 소년이었어요. 그러나 그의 팀은 리그에서 이기지도 못했어요. 내 말이 이겁니다, 도시는 재능으로 꽉차 있었어요.저는 나중에 느바 올스타가 될 재능을 말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도 최고 수준으로 늘 플레이해야 했죠'

'모든 상대팀에는 두세명이상의 중요한 선수들이있었어요' 오트리가 말합니다.'그 시절이 역대 최고 수준이었죠. 모든 팀이 강했고그 시절 주목을 받으려면 정말 모든 게임 다 잘해야 했습니다. 왜냐면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였죠'. 

Tolentine고등학교(1991년 문을 닫음)는 88부터 Glenn Falls에서 열린 state Federation championship우승으로 최고로 도약했고, 실리는 38점12리바를 준결승에 21점 15리바를 결승에서 기록했다. 몇 주전에톨렌타인은 Anderson;s Molly 고등학교를 Catholic Athletic Assodication championship에서 이겼고 싱이는 26점 10리바로 이끌었다. 그는 87-88년 뉴욕주의 Mr. Basketball로 지명되었다. 

'그는 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췄습니다.' 샌안드레아가 말한다. '그는 6피트 7인치였죠. 그는 예외적으로 빠르게 뛰었고 폭발적으로 점프했습니다. 모든게 다 빨랐죠 손과 발 모두. 그는 시야에서 보이지도 않지만 갑자기 나타나서 득점하고 보드를 쓸어담죠'.

언급된 숫자들은 단지 숫자일 뿐이고 그때 실리와 뛴 선수들은 보이지 않는 활약들을 먼저 말한다. '우리가 게임전 라커에 있을 때 전 스카우팅 리포트만 말하고 자리를 뜨죠' 샌안드레아가 말한다. '그리고 말릭인 'Ra, Ra, Let's go'라고 외치고 우리는 31승 1패를 했죠. 우리는 항상 같은 게임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묻죠. 저는 항상 '저도 몰라소 나도 거기 없었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런 리더였습니다. 그가 게임에 가져다 준 것을 담아서 팔 수 있다면 당신은 재벌이 될 수 있을 것이에요'

'그는 승리자였습니다.' 리스가 말한다. '만약 그가 리바운더로 플레이해야 한다면 그는 15리바에 10점을 기록 해 줄거에요. 그는 게임에 그렇게 공헌했죠'

자연적으로, 그의 대학 recruitment는 큰 일이었다. 많은 팀이 그를 원했다. CBS에서 48hours라는 뉴스쇼를 진행했던 Dan Rather는 이 과열된 리크루팅에에 대해 탐사보도했고 댄 그자신도 직접 고등학교를 방문했다. '저도  찾아온 사람이 댄 래더란걸 몰랏네요' 샌안드레아가 말한다. '그가 댄과 함께 브롱크스를 걷고 있었고 댄이 그와 말하고 있었죠. 그가 말해야 될 건 하나뿐- 그의 능력인 토탈 패키지란 거죠'.
뉴욕의 아들이었던 실리는 전설적 코치 Lou Carnesacca가 있는 St. John's를 선택했다. '다들 대학진학을 위해 도시를 떠나지만, 그는 뉴욕 그 자체같은 사람이었어요' 오트리가 말합니다. '그가 집에 남기로 한건 큰 선택이었죠'
실리는 1학년치고 괜찮았다. 12.9점, 6.4 라비를 기록하고 파포/센터에서 스포로 포변을 하였다. 6-11 Robert Werdann이 Red Storms의 스타팅 센터였기 때문이다. 

'그의 게임은 진화했습니다. 왜냐면 늘 페인트존에서 플레이하지 않기 시작했죠' 월던이 말한다. '그는 스포가 될 거였고 핸들링을 할 수 있는 슛을 할 수 있는 선수가 되었죠.'

진화는 3년간 더욱 강화되었다. 실리의 득점력은 2년차에 18.1점, 22.1점 4학년땐 22.6까지 올랐다. 세인트존스는 91년에 Elite 8, 에 진출하고 실리는 all Big-East 퍼스트팀이 되었다. 그는 크리스멀린의 100경기연속 두자리수득점기록을 깨고(102게임) 대학에서 2402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멀린 다음가는 기록이다. 

확실한 것은 현재까지도 실리는 세인트 존스의 최고 선수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2011년에 ESPN은 세인트존스의 최고선수랭킹을 뽑았는데 실리는 Mullin과 Walter Berry다음 3등을 했다. 베리는 존 우든 상을 받고 85년에 파이널 포로 이끈 선수이다. 

실리는 92년 드랩에서 14번 픽을 받고인디애나에 지명되었다. 비록 첫 두시즌에 기초를 다지는 데 힘들었지만 그는 솔리드한 롤플레이어로 자리잡았다. 그는 94년에 마크잭슨과 트레이드되어 클립스로 옮기고 커리어 최고 숫자를 찍는다; 13.0점, 96년에는 13.5점으로 커리어하이.
하지만 그가 지짜 집을 찾은 것은 몇년뒤 미네소타에서 였다. 그는 자신을 우상으로 모시고 있던(worshipped) 말라깽이 스몰포워드 케빈 가넷과 함께 뛰었다 - 가넷의21번은 실리의 대학시절 번호였다.
실리의 득점은 96-97만큼 못했지만 99-00년에 더 많은 선발출장을 했고 가장 많은 어시스트와 리바운드를 기록했다. KG, 월리 저비악, 조스미스, 테렐 브랜든을 데리고 있던 올라가는 팀에서 29살의 실리는 마치 older statesman, squad's glue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는 친밀함을 설교했습니다' 실리의 인디와 미네시절 팀메이트였던 샘 미첼이 나중에 타임즈지에 말했다. 그는 우리의 질투나 계약, 비즈니스 같은 것을 내려놓으면 우리가 이길것이라고 말했습니다.'

90년대 후반, 실리는 오프코트에서도 스타로서 역할을 하는데, 샌안드레아가 확인해준 바에 따르면 그는 농구 말고도 잘 하느 것이 너무 많았다. 그는 Malik Sealy XXI라는 의류회사를 운영했고 목걸이, suspender등을 Barneys, bloomingdale등에 납품하였다. 그는 인디애나 패이서스 치어리더들이 93년에 입은 유니폼을 디자인하였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았고 도전했죠' 리스가 말한다. 실리와 그 친구들은 Baseline Studio를 만들었고 거기서 JayS Blueprint, Cam'ron's Come homewith me가 레코딩되었다. (프로두서 Just Blaze가 이 공간을 구매했고 2010년에 문을 닫았다).

그리고 아마 가장 유명하게도 그는 많은 TV와 영화에 출연했는데 우피골드버그의 블록버스터 Eddie, 에서 닉스의 슈퍼스타 Stacey Patton역을 맡았다. '그가 한 역할의 매력은 그자신과 정반대의 성격이란 거에요' 샌안드레아가 말한다. '완벽히요'

실리는 2000년 5월 20일 살해당했다. 민에가 포틀랜드에게 플옵에서 패배한지 몇주뒤였다. 97년에도 음주운전 전과가 있던 한 술취한 운전수(Souksangouane Phengsene이란 이름)가 에어백도 없던 실리의 SUV를 들이받았다. 

범인은 criminal vehicular homicide로 기소되었으나 3년뒤 풀려난다.; 그는 2006년에 음주운전으로 또 걸리고 1년도 안되서 풀려난다. 그리고 2008년에 또 걸렸으며 현재는 8년형을 선고 받고 수감중이다. 

가넷과 조수미는 이 비극후 실리의 이름을 그들의 팔에 문신으로 새겼다. 그들이 2000년이후 서로 경기에서 마주칠 때마다 서로 팔을 맞대며 세상을 떠난 그들의 친구에게 경의를 표시한다. KG는 리버사이드교회에서 치른 장례에서 관을 메었다; 축일이 되어야 할 그의 생일마다 그는 친구이자 멘토였던 실리를 생각한다. '아는 말릭이 나에게 늘 하던 말이 생각나요. '니가 해야 할 것을 해 친구, 그리고 코트에 모든 것을 쏟아버려. 그러면 너 자신에게 자랑 스러워질거야' 가넷이 실리가 떠난 10년 뒤ABC와 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노든 사람이 현재 자신의 모습을 가지게 된 계기들은 하나씩 가지고 있을 겁니다. 저에겐 실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어요'.

실리는 그의 아내 Lisa, 아들 Sealy Jr.의 마음에 아직 살아있다. 그는 Westminster County의 Ferncliff Cemetery에 묻혀있으며 그곳엔 그의 이름을 딴 말콤 X도 잠든 곳이다. 

14년뒤, 실리의 친구들은 아직 그를 한줄기 빛으로 이야기한다. 어디에 가던 누구를 만나던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던 사람. 

'그는 리더였어요' 오크리가 말한다. '모두가 그를 사랑했고 그는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았어요. 누구의 기분도 상하지 않게하였죠. 그는 모두를 동등한 구성원으로 느끼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Reese가 말한다 :'그는 남자중의 남자였습니다(He was a man among 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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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6-08-28 20:05:23

의외로 미국도 음주운전에 관대한가보군요.

WR
2016-08-28 20:16:40

막을 수 있었던 사고라는 생각입니다 ㅜㅜ

2016-08-29 09:36:28

이 분이 더 살았더라면 내내 논란이 되어왔던 가넷의 인격적인 부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주었을겁니다. 가넷의 우상과도 같은 선수였는데 하필이면 생일 파티 후에 그리 되어서 가넷의 충격이 더 컸죠.


선수 자체의 기량은 살짝 트위너기도 하고 좀 애매했는데, 경기 외적으로 선수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준 베테랑이었죠.

WR
2016-08-29 11:02:20

기량을 떠나서도 경기외적으로 이렇게 리더가 되는 선수가 있단 걸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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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9 12:38:48

사실 그런 선수들은 더러 있습니다. 현역 시절에 기량 자체는 평범했으나 팀원들을 다독이거나 휘어잡는 라커룸 리더로 이름난 선수들로, 마이클 커리, 샘 미첼, 애드리언 그리핀, 에릭 스노우, 네이트 맥밀란, 데릭 피셔, 에이버리 존슨 등등이 이름났죠. 이들 중에는 리더쉽을 살려서 지도자 쪽으로 진출한 경우들도 많습니다. 다만 리더쉽이 훌륭한 감독의 일차 척도는 아니기에 실패한 케이스들도 더러 많지만요. 

2016-09-03 13:53:14

반에서 1등하는 친구가 그 반의 리더는 아닌 거 같은거죠


http://www.rookie.co.kr/bbs/board.php?bo_table=nbanews&wr_id=2857 

퍼킨스 같은 선수도 실력으로는 언급도 잘 안되거나  희화화 되기도 하지만

의외로 가는 곳마다 리더 역할을 했다고 하죠  
2016-08-30 12:04:11

에디 라고 우피 골드버그 나오는 영화에서 그 영화의 주제를 상징하는 배역으로 나왔죠. 

패스 안하는 에이스가 패스를 배워가는 그런 내용이었는데 이 글 보니까 갑자기 생각나네요. 
WR
2016-08-30 12:44:04

네, 본문에도 조금 나오더군요


그리고 아마 가장 유명하게도 그는 많은 TV와 영화에 출연했는데 우피골드버그의 블록버스터 Eddie, 에서 닉스의 슈퍼스타 Stacey Patton역을 맡았다. '그가 한 역할의 매력은 그자신과 정반대의 성격이란 거에요' 샌안드레아가 말한다. '완벽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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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6-09-05 07:49:11

가넷의 21번이 저선수를 좋아해서라고 들어서
유명한 선수도아닌데 의외다 했는데 꽤 잘했나보네요

그리고 본문대로 자기생일마다 고인이 생각난다는건 너무괴로운 일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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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7 17:27:08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참 훌륭한 선수였기에 이리 오래 기억되네요

다시 생각할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2016-09-25 01:52:22

말릭 실리라는 분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이네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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