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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2위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눈물겨운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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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3 21:25:07

지난 글에 이어집니다.


1967년 11월 불세출의 스타 박신자가 은퇴한 이후에도 여자농구의 인기는 여전했습니다. 길고 긴 상업은행의 독주시대가 끝나고 7~9개 팀들이 패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는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어 팬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재창단한 조흥은행은 전국시대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습니다.


박장군배 대회, ABC대회,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박신자의 팀을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일본은 그녀가 은퇴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타도 한국을 외치며 여자농구에 국가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1968년 2회 ABC대회 결승에서 한국에게 60-72로 패했지만, 한국팀 고유의 슈팅폼을 벤치마킹 하며 조금 더 멀리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드디어 1970년 2회 ABC대회에서 한국을 꺾고 우승함으로써 양국은 본격적으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1971년은 브라질에서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가 열렸고, 이 대회에서 우리 대표팀은 진정한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64년 대회에서 월드베스트5와 득점왕에 올랐고, 지난 67년 대회에서 월드베스트5와 MVP에 올랐던 박신자 선수 없이도 세계 2위를 지킨다는 목표로 대표 선수들은 오랜 시간동안 스파르타식 훈련을 해왔습니다. 지난 67년 대표선수들 중에는 주희봉과 김영임만 대표팀에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새로운 선수들로 채워졌습니다. 박신자의 센터 자리는 강부임이 대체했고, 지난 67년 대회 체코전에서 종료 직전 극적인 가로채기를 성공했던 주희봉은 팀의 에이스 역할을 맡았습니다.


1971년 브라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소련은 명실상부한 무적의 팀이었고, 지난대회 2위인 한국을 비롯해 지난대회에서 한국에 버저비터를 맞고 3위에 그친 체코와 홈의 이점을 활용하려는 브라질 그리고 타도 한국의 기치를 내건 일본이 각각 2위를 목표로 출정했습니다.


그 대회의 가장 큰 특징은 미국 대표팀이 최초로 참가한 점입니다. 미국 대표팀은 여자 대학생들 위주로 선발되었지만 순수 아마추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는 미국의 여러 대학에 농구팀이 있었지만 학교간의 체계적인 경쟁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여자농구에서 NCAA 디비전1 리그와 토너먼트는 1982년에 들어서야 활성화 되었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최초의 대결이 이뤄졌던 예선 첫날에 우리는 미국에게 86-50의 대승을 거뒀습니다.


우리나라는 대회에 출전한 13팀 중 상위 8팀이 겨루는 결선리그에 손쉽게 올랐습니다. 일본과 체코를 꺾으면 세계 2위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팀은 예선 두 번째 날 홈팀인 브라질에게 덜미를 잡혔습니다. 심판의 불리한 판정 속에서 우리팀은 주희봉과 조영숙 이외에 모든 선수들이 부진했고, 브라질 센터 가르시아에게 26점을 내주며 63-70으로 패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과의 대결에서 황선애가 20점을 올리는 활약에 힘입어 73-63으로 승리해 여전히 아시아 최강임을 입증했습니다. 또 다른 희소식이 있었습니다. 한국을 꺾은 브라질이 체코에게 9점차로 패함으로 인해 우리가 마지막 날 체코에게 8점차 이상으로 승리한다면 세계 2위를 지킬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팀은 약체로 평가받던 쿠바에게 의외의 덜미를 잡혔습니다. 전반에 우리가 크게 리드하자 이상훈 감독은 체코전을 대비하기 위해 주전 선수를 전부 쉬게 하고 벤치 선수들을 내보냈는데, 그런 사이에 쿠바가 역전에 성공했고 그 기세를 몰아 주전들이 다시 투입된 우리나라에 승리하는 이변을 연출했습니다.


브라질의 교민들은 물론 승전보를 기다리던 고국의 팬들도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낙담했습니다. 팀 내부에서도 우울함 속에 작전미스를 탓하는 자책감이 분위기를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우리팀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지난 대회 체코를 꺾을 때 멤버였던 주희봉과 김영임이 각각 20점과 19점을 득점하는 활약으로 대회 마지막 날에 체코에게 74-71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소련-체코-브라질에 이어 세계 4위를 차지했고, 일본이 5위로 그 뒤를 이었습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차기 올림픽인 1976년 몬트리올 대회부터 여자농구를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하는 안건이 가결되었습니다. 이제 여자농구는 올림픽 종목이 되었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은 여섯 개의 나라에게 출전권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올림픽에 앞서 열리는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도 여자농구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습니다. 1974년 아시안게임에서의 여자농구 한일전은 우리에게 가장 뼈아픈 기억으로 남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승자가 금메달을 가져가게 되는 사실상의 결승전에서 우리팀은 이옥자, 김재순, 원영자, 조영순, 유쾌선, 강현숙 등이 주축을 이뤘는데, 후반에 4명이 5반칙 퇴장을 당한 가운데 경기종료 6초전에 1점을 리드한 상황에서 볼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팀은 볼을 돌리는 대신 원영자에게 슛을 하게 했고, 리바운드를 잡은 일본의 가드 나마이는 종료와 동시에 포기하듯 하프라인에서 공을 던졌습니다. 그 공은 기적처럼 버저비터가 되었고, 일본이 71-70으로 승리하여 아시안게임 여자농구 최초의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1975년 콜롬비아에서 열리는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는 우리에게 지난 대회에서 브라질과 쿠바에 패했던 아픔을 씻을 수 있는 기회이자 아시안게임에서 일본에 당한 통한의 패배를 설욕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반드시 3위 이내에 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대회 3위까지 몬트리올 올림픽 자동 출전권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여섯 나라 중에는 개최국인 캐나다가 반드시 포함되고 세계선수권 대회 1,2,3위 국가가 포함되며, 나머지 두 나라는 추후에 선정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1975년 콜롬비아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우리나라 대표팀에서는 세대교체가 일어났습니다. 외환은행의 21살 장신(172cm)가드 강현숙이 신인섭과 함께 대표팀의 중심이 되었고, 이들과 함께 원영자, 이옥자, 박성자가 주로 팀의 주전으로 기용되었습니다. 대표팀에 새로 선발되어 이들과 함께 뛸 선수들은 김경순, 정미라, 조경자, 조영란, 박찬숙 등이었습니다. 신장과 스피드를 모두 갖춘 박찬숙과 조영란은 각각 숭의여고 1학년과 덕성여고 3학년 학생이어서 곧바로 주전으로 가용되기는 어려웠기에 175cm의 박성자가 주전 센터로 외국의 장신 센터를 상대해야 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옥자 선수는 야구선수 이광은의 누나로 훗날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모두 여자 프로농구 여성감독 1호를 장식하게 됩니다. 이옥자씨의 남편은 몇 년 후 여자농구대표팀 감독이 되는 정주현입니다. 정주현씨는 80년대 초 남자대표팀 감독도 지냈습니다. 여튼 1975년 국가대표를 돌이켜보면 (강현숙을 제외하면) 주전보다는 후보명단에 오른 선수들이 더욱 쟁쟁해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1975년 대표팀은 강팀이라기보다는 과도기 팀에 가까웠습니다. 이런 팀을 스파트타식 훈련으로 이름 날린 이경재 감독과 임영보 코치가 혹독하게 조련시켰습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3위에 드는 데 실패하고 5위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는 이탈리아에 2점 차이로 패하고 결선리그에서 일본과 맞붙었는데, 우리나라 여자 농구가 생긴 이후 그때까지 한국팀이 겪은 패배 중에서 가장 치욕스럽게, 89-62 27점 차이로 무너졌습니다. 한국팀에서 두 자리 득점을 기록한 선수는 강현숙(18점), 신인섭(12점)이 전부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와키다시로가 21득점, 미야모토가 18득점, 아시안게임 버저비터의 주인공 나마이가 16득점을 올리며 우리 수비를 유린했습니다. 일본은 우리를 61-55로 꺾은 체코에게도 70-58로 승리함으로써 전승을 거둔 소련에 이어 세계 2위에 오르며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습니다.


남은 두 장의 몬트리올 올림픽 티켓을 따내기 위해 우리 대표팀은 10개국이 경쟁하는 캐나다 해밀턴 프리올림픽에 참가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매우 선전했으나 아깝게도 3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8위에 머물었던 미국이 1위를 차지해 올림픽 티켓을 거머쥐었고, 불가리아도 2위를 차지해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가까스로 올림픽에 출전한 미국과 불가리아는 올림픽에서 전승 소련에 이어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을 따냈습니다. 미국 여자농구팀은 NCAA 디비전1 리그와 토너먼트가 시행된 1982년 이후 순식간에 소련을 위협했습니다. 198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소련이 미국을 꺾고 우승했지만 그 이후에 열린 거의 모든(1992 올림픽과 1994, 2006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동메달)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었습니다.



여자농구 대표팀이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는 데 실패했지만, 걸출한 신인들이 많이 배출되어 국내에서 여자농구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1975년에 선경(SK)과 한국화장품이 팀을 창단한데 이어 1976년에는 태평양화학(아모레퍼시픽)이 창단되어 두 화장품 업체의 라이벌전이 열기를 뿜었습니다. 한국화장품은 김재박, 황규봉, 김유동 등 대학졸업반 스타들을 싹쓸이해서 야구팀을 창단하여 그 즉시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1977년에는 동방생명(삼성생명)이 창단되어 은행과 실업팀을 합쳐 11개팀이 되었고 팀들의 잦은 해체는 더 이상 없었습니다.


실업팀의 열풍 속에서도 1976년에 졸업한 조영란은 상업은행을 택해 이옥자와 한팀이 되었고, 그 해에 창단한 태평양화학은 남자농구의 전설인 신동파를 감독으로 영입했습니다. 태평양화학은 창단 첫해에 홍영순, 홍혜란, 박경자, 조향숙 등 각 포지션마다 올스타급의 선수들로 포진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홍혜란 선수가 단연 인기의 초점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홍혜란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이돌급 여자농구선수였습니다. 물론 강현숙 선수의 인기도 좋았지만 그것은 출중한 실력과 성실한 리더십 때문인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반면에 홍혜란 선수에게는 남자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특별함이 있었습니다. 얼굴이 예뻐서가 아니라 농구하는 자태가 예뻤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실제 홍혜란 선수는 튀는 성격이 아니라 차분한 노력파였습니다. 홍혜란 선수가 국가대표로 태릉선수촌에 입성했을 때, 거의 모든 종목의 선수들이 그녀에게 눈독을 들였지만 전혀 흔들리지 않고 운동에 전념했던 선수였슶니다.


그런데 인기 절정인 25살에 홍혜란 선수는 결혼을 하고 은퇴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농구선수 출신이었지만 스타플레이어는 절대 아니고 팀내에서도 크게 존재감이 없던 이왕돈 선수였습니다. (미남과도 거리가 멉니다.) 그 대신 대화에 능하고 주변 사람을 즐겁고 편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도 그분의 지인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국가대표 출신 진효준 선수가 둘을 소개시켜준 걸로 알려졌는데, 진효준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그 이야기를 자세히 적었습니다. 안타까우면서도 뭉클한 이야기이기에 진효준 선수의 블로그 글을 링크합니다.

http://blog.naver.com/jhj5530/100085943734

태평양화학팀의 창단 즈음 우리 체육계는 1979년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를 서울에 유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열리는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는 북한의 평양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두 대회 모두 반쪽대회로 전락했고, 1980년과 84년 올림픽마저도 반쪽대회로 전락하는 극한대립이 이어지던 시점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97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소련과 동유럽이 불참하는 경우 우승까지도 충분히 노려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기대감의 핵심에는 박찬숙이라는 당대의 스타가 있었습니다.


박찬숙은 홍혜란의 숭의여중, 숭의여고 후배로 중학교 3학년때 대표팀에 발탁되었고, 고1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활약했던 스타 중에 스타였습니다. 그녀는 중학생때 이미 185cm를 넘는 신장을 지녔고, 고등학교 졸업 시점에는 190cm(사실은 이보다 약간 작습니다)의 공인 신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신탁은행에서 센터로 활약하던 김정련 선수도 박찬숙 만큼 키가 컸지만 스피드, 슛, 패스, 드리블 모두 박찬숙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김정련 한명 때문에 서울신탁은행은 최강팀급 성적을 내고 있었습니다.) 박찬숙은 명실상부한 제2의 박신자로 불리고 있었고, 그녀를 잡는 팀은 향후 10년동안 우승을 석권한다는 말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박찬숙은 신체조건과 기본기 뿐 아니라 BQ도 뛰어나고 심지어 플로핑에도 일가견을 보였습니다. 박찬숙을 잡기 위한 전쟁에서 승리한 팀은 태평양화학인데, 거기에 대해 구설수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정권 실세 개입설이 정설일 정도였습니다. 박찬숙은 박신자와 함께 우리나라 여자농구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명의 인물이고, 실제로 박신자보다 더 오래 대표선수생활을 했습니다. 세계적인 명성은 박신자에 크게 못미쳤지만 박찬숙은 우리나라가 1979년 세계선수권과 1984년 올림픽에서 2위를 기록하는데 핵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다음 글은 1979년 세계선수권 대회와 그 전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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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6-09-04 08:05:00

와 꿀잼 감사합니다

2016-09-04 09:58:07

감동입니다.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1
2016-09-04 13:56:32

전에 이곳 게시판에서 역대 여농 레전드들을 꼽는 댓글에 박찬숙 선수 이름이 잘 안보여 섭섭했는데, 이 글에서 박찬숙 선수를 다룬 내용을 보니 너무 반갑네요...
박신자 선수의 플레이는 한번도 본 적이 없고...제가 본 기준으로 박찬숙 선수는 여전히 제 마음 속 넘버원 센터네요.

2
2016-09-04 16:21:16

박찬숙 최고의 선수였죠. 박신자의 플레이를 본 사람은 드물테고

박찬숙의 전성기를 본 사람들은 역대 최고의 플레이어로 박찬숙을 대부분 꼽을 겁니다.

(흔히 많은 분들이 전성기라고 알고 있는 84년 올림픽은 이미 전성기를 지난 시점! 78년~82년 정도가 박찬숙 농구의 정점이지 싶습니다)

인터넷 상으로는 박찬숙의 전성기...아니 박찬숙 플레이를 본 사람 자체가 많이 없으므로

아무래도 레전드 꼽기 놀이에 박찬숙의 이름이 누락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과장 좀 보태면

30년 후 여자배구 레전드 이야기 하는 데 김연경의 이름이 빠져 있는 그런 경우랄까요?

2016-09-04 15:44:34

역사서적보는 느낌이네요.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1
2016-09-04 16:12:03

저 번 편에 이어 이번에도 잘 봤습니다. 글 막 후반부 부터 직접 본 스타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다음 편이 벌써 기다려지네요.


그나저나..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 여농 국대 팀엔 미녀 선수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강현숙-정미라-홍혜란-박진숙 등등....젊은 분들은 못믿으시겠지만 박찬숙도 한 창때

미녀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선수기도 했지요. 사실 당시 생각하면 시원시원한 마스크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리고..태평양 창단 멤버 중에 조향숙이 아니고 조양숙일겁니다. 당시로는 굉장한 신장인 184cm

빅맨

WR
2016-09-04 16:52:45

박찬숙씨는 고1때인 콜롬비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미스월드 바스켓으로 뽑혔을 정도입니다. 말씀처럼 미녀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죠. 박찬숙이 태평양화학에 가게 되던 때 고등학교 슈퍼스타로 이름을 날리던 전미애씨도 미녀였습니다. 졸업 직후에 곧바로 대표팀에 뽑혔고 큰 기대를 받고 한국화장품에 갔는데 부상이 잦았고 태도가 거만하다는 지적도 많이 받았습니다. 너무 일찍 은퇴하고 결혼해서 팬들에게 금방 잊혀졌지만 짧은 기간에나마 시대를 대표하는 미녀스타(실제로 신혜인보다 예뻤죠)였습니다.


그리고 말씀처럼 조양숙이 맞습니다. 조양숙씨를 기억하는 분이 계셔서 정말 반갑습니다.

2016-09-05 13:51:30

개인적으로 아마농구에 잠시 발을 걸친적이 있는데 다음글에는 그때 자주 뵙던 김화순 선생님의 내용이 나오리라 예상됩니다.

제가 그 시절에는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전설적인 활약상을 어깨너머로 이야기로만 들어 아쉬웠는데 Damon Bailey님의 잘 정리된 글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스타플레이어 출신이셔서 까칠(?)하실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굉장히 따뜻하시고 배려심 깊은 분 이십니다.
(그 때 사인을 받았어야 하는건데...따님 사인도...)

양질의 글들을 써주서서 항상 감사합니다.

2016-09-06 08:47:27

이광재 선수와 이유진 선수 부모님이 이왕돈, 홍혜란 씨였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6-09-06 17:16:48

홍혜란씨는 코트위의 제비 라고 불리울정도로 자태가 이뻤답니다.

빼어난 드리블솜씨도 너무 멋졌구요..비하인드 드리블 하는 데, 눈이 휘둥그랬졌답니다.

그 이후로 제 No.1플레이어..

아쉽게도 슛팅력이 좀 모자랐어요.....그게 좀 답답했지요.

그 이후 박양계라는 불세출의 가드가 또 등장하긴 했지요. 너무나 전성기가 짧아서 너무나 아쉬웠던..

최근 글 보고 이글도 보고 갑니다...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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