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
자동
Free-Talk

이말년 曰 '개판이네.jpg'의 의미에 대해서

 
12
  5885
2011-05-27 18:50:15
 
 

 
 
도대체 이말년 만화가 인기를 끌 수밖에 없는 세상인 것 같습니다.
 
 
프랑스혁명이 대규모의 살육을 초래했던 것을 아시지요? 혁명 초기엔 귀족이, 이후 공포정치 아래서 십여만 명이 넘는 수많은 시민들이 학살됐답니다.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평등'이란 이념을 내걸고 대규모의 살인이 벌어진 거죠. 미친 세상이었고, 이 '미친 세상'은 20세기까지 다이내믹하게 이어집니다.
 
 
장 자크 루소 있잖아요. 사회교과서에 "자연으로 돌아가라", 직접민주주의의 주창자라고 나오는...... 이 루소가 이란 책을 쓰는데, 이 책은 당시 혁명의 지도자들에게 금과옥조로 떠받들여지지요. "책 한 권이 혁명을 낳았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루소 자신도 혁명열사의 묘소 판테옹에 묻혔구요.
 
 
근데 루소가 한 기막힌 통찰이 있습니다. "인간은 모이면 모일수록 타락한다"가 바로 그거예요. 루소는 소규모 공동체의 직접민주주의적 사회가 아니면 인간은 정치적 지배/피지배와 굴종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봤어요. '근대국가'는 루소의 생각과 정반대로 간 정치집합체이구요. 어쨌거나 루소는 근대의 문을 활짝 열었으면서도, 동시에 근대의 본질적 어둠을 바라봤던 역설적인 사상가죠. 또 천재적인......
 
 
각설하고, 사회가 점점 더 괴상망측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정의의 사도들은 점점 늘어나는데, 저는 그 정의감이 오프라인에서도 발휘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여하간, 제가 보기엔 요즘 인터넷은(그리고, 오프라인 역시) 총체적인 개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악다구니 같은 풍경에서, 그간 억눌리고 옥죄어진 인간들의 불쌍한 넋두리를 봅니다. 모든 류의 악플들에선 뭉크의 비명이 떠올라요.
 
 
인간은 존중받고, 인정받으며 살지 않으면 안 되는 동물입니다. 우리가 다들 살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정말 칭찬, 격려 하나가 사람을 사람답게 지탱한다는 거죠. 인생은 그렇게 작은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고, 한 사람을 건강하게 성장시키는 것은 바로 그 작지만 긍정적인 신호들입니다. 슬램덩크의 강백호를 만들어낸 채소연의 밝은 웃음과 한두 마디 말들을 생각하면 됩니다.
 
 
남한테 꾸준히 솔직하고 담백하게 존중과 인정을 받아본 사람은, 절대로 타인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격언도 이런 맥락이지요. 또 이런 연구결과도 있죠. 이주민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성향을 통계적으로 보았더니, 자신의 삶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이주민(외부자)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포용하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더랍니다. 이런 시각은 인간사회의 갈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포인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말고도 이런저런 사냥이 들끓는 인터넷판을 더욱 냉철하고 해박하게 바라보는 분들도 많겠죠. 단지 하나의 시각 정도로 이란 책을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게 프랑스의 한 저널리스트가 일본의 '오타쿠'들을 밀착 취재해서 보여준 책인데요.
 
 
동인지에 미쳐있는 젊은이, 게임이나 포르노에 인생을 건 히키꼬모리, 동경대를 졸업하고 프라모델 오타쿠가 된 엘리트 등등이 등장한 배경과, 또 그들 안에 숨겨진 '비명'을 재밌고 안쓰럽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지만 도저히 나갈 수 없는 연약한 영혼들...... 저자는 흔히 말하는 일본의 입시지옥, 개인의 개성을 말살하는 가정과 학교의 문화, 남보다 반드시 높은 곳에 올라가야만 한다는 경쟁일변의 사회적 강박관념 등을 '오타쿠'를 낳은 배경으로 꼽고 있습니다. 요컨대, 그들은 괴물이 아니다라는 게 저자의 논지입니다.
 
 
아래에 옥주현 관련 글에서 비즐리 님께서 "국가를 이끌어가는 장관 후보자들은 누가 나오는지도 모르고 비리가 있어도 아무 상관 안하면서 별볼일 없는 일개 연예인에게 왜 그렇게 공정함과 엄격한 사생활을 요구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지적하셨지요. 물론, 농구천사님의 비판처럼 '정치'가 '연예계'보다 중요한 이슈라는 시각은 이제 진부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부함이 자신들이 사는 사회의 중대사를 외면하고, 미디어가 달콤하게 포장해주는 연예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너도나도 달려들어 왕왕 짖어대는 세태를 정당화시켜주진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글 처음에 쓴 루소를 상기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 싶네요. 인간은 모이면 모일수록 타락한다는 그의 말은, 인간이 혼자 살아야 한다는 주장은 아닌 듯합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에 건강한 영향을 미치면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헌데, 프랑스의 혁명기나 지금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자신의 진짜 생활을 통해 정의를 발견하고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걔네에겐 단두대가 있었고, 우리에겐 입이 있는 거고.......
 
 
그러니깐 제가 보는 개판은, 이 아니라 에서 '정의'와 '진실'을 기도하는 세상입니다.
 
 
 
19
Comments
2011-05-27 18:52:18
좋은 글 잘 봤습니다.
WR
2011-05-28 10:17:41
2011-05-27 19:11:49
정말 좋은글이네요 그리고 정말 동감 하구요..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정말 디테일하게 적어주신거 같아서 감사하기도 하네요 ^^
WR
2011-05-28 10:19:39

Kirk불스왕조Gordon님께서 그런 생각들을 품고 계셨기 때문에, 그런 분들을 바라고 저도 글로 옮길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거겠죠. 고맙습니다.

2011-05-27 19:56:50

사회계약론에 대해서 조금 더 보충하자면 현대의 근대국가에서 사용되는 사회계약론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아니고 홉스와 로크의 사회계약론의 절충입니다.

루소는 엄밀히 말해 민주주의자라기보다는 대의공화제와 군주제를 불신한 사람입니다. 루소가 "인간은 모이면 모일수록 타락한다."라는 언술은 "권력과 이익이 축적될 때" 단서가 꼭 달려야 합니다. 오히려 루소는 소규모 공동체로서의 연결로서의 국가에 대해서는 긍정합니다.

결정적으로 프랑스 대혁명 이후 집권한 로베스피에르는 대단한 루소 추종자였지만 그 이후에 등장한 공화제의 프랑스 지도자 중에서 나폴레옹제정에 이르기까지 루소를 추종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재밌는 건 캄보디아의 어마어마한 대량학살을 저지른 크메르루주가 만들렸고 했던 세상도 루소적인 커뮤니티로 세계를 구축하려던 겁니다.

WR
2011-05-28 10:28:43
세밀한 부연 감사드립니다. 저도 로베스피에르 이후 루소를 추종한 지도자는 없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좀 문제적인 인물이긴 했지요.^^
 
루소의 일반의지론이 독재와 연결될 수 있단 지적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죠. 그런데,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 얘기는 처음 들어보네요!! 루소에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참 대단히 씁쓸한 경우이군요.
2011-05-27 20:01:40
좋은글 잘 봤습니다.
생각을 글로 적어 내기 쉽지 않은데... 눈이 정화되는 글이였습니다 ^^
WR
2011-05-28 10:29:00
Updated at 2011-05-27 21:00:39
글쓴이가 누구인지 보지 않고 글을 열줄쯤 읽어내려가다가
"장미의 이름" 님이 쓰신 글이군 .. 이란 생각에 글쓴이를 봤는데 역시나 ..
 
닉네임도 그렇고 .. 글 쓰는 걸 업으로 하시는 분 같네요.
저 역시도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기에 왠지 모르게 반가운 기분이 듭니다.
 
각설하고, 언제나 좋은 글 잘보고 있습니다 ^^
WR
Updated at 2011-05-28 10:48:17
으... 스타일을 좀 바꿔봐야 될 것 같아요. 열줄쯤 읽고 탄로나다니. ㅠ.ㅠ
 
저도 글쓰는 걸 간접적으로나마 업으로 삼고 있긴 한데, 와. RANG님. 제가 많이 배워야겠습니다. 부족한 점이나 요게 요러면 좋겠다 하는 점 있으면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요. (대신 살살..헤헤헷) 앞으로 게시판에서 RANG님 글도 자주 볼 수 있길 바랍니다. 
 
2011-05-27 21:43:01
'남한테 꾸준히 솔직하고 담백하게 존중과 인정을 받아본 사람은, 절대로 타인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라는 문장이 너무 맘에 와닿습니다.
주위에서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베풀 줄 알고, 더 여유가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까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열등감과 컴플렉스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남을 깎아 내릴 때가 많더라구요.
 
잘 읽었습니다.
 
WR
2011-05-28 10:33:49
아니, 외국이셨다면 먼저 말을 해주셨어야죠
 
하하 농담이구요. 제 불타는 원서 욕심에 불을 댕기셨습니다. (물론 엄청 느리게 읽지만...) 
2011-05-28 16:16:09
네 사실은 저도 원서 얘기를 언급하려고 했습니다 ^^;
그런데 많은 인문학/사회학 쪽 도서들은 어차피 유럽 나라의 언어들에서
한번 영어로 번역 된 것이라 어쨋든 이것도 완벽한 오리지날이라고 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2011-05-27 22:41:35

연예인을 비판하는게 더 쉽고 연예인을 보도하는게 더 자극적이니까요

공직에 있는 인물들을 비판하기에는 정보가 작고 가치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뿐더러 언론의 보도 또한 편향적인 부분이 있어서가 아닐까 합니다. 
너무 자괴감을 갖지는 말자는 취지에서 다는 댓글입니다 ^^;
WR
2011-05-28 10:38:01

동감합니다. '글'이란 언제나 진짜 '현실'보다 민감하게 흐를 소지가 있고, 제 글쓰기 또한 그런 데서 자유롭진 못한 것 같습니다. 지적 고맙습니다!

2011-05-28 03:33:13

정말 좋은 글인데 댓글수는 의외로 적네요;
공감 많이 하고 갑니다.

WR
2011-05-28 10:38:29
무플이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고맙습니닫.
Updated at 2011-05-28 10:15:28

동의하는데 이런 글로 돌려서 얘기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은 변하지 않지요. 안타까운 모습이라고 할까요. 악플러를 비난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악플러의 정점에 서있는 사람들... 한편으론 불쌍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현실에서 스트레스가 쌓이면 넷상에서 저렇게 공격적일까.


확인되지 않은 소문으로 남을 단죄하고 정의를 울부짖고 진실을 요구하고 그러다가 자신들의 주장들이 틀림을 알았을 때는 거의 대부분은 반성없이 다음 사냥감으로 넘어가고 이런 모습들이 무한 반복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은 분명 한국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단 증거인듯해서 씁쓸합니다.
WR
2011-05-28 10:43:43
그런 분들이 이런 글로 변할 수 있을리 만무하죠. 아예 읽지도 않을 듯한...... 대신에 그런 분들을 '포위'하는 분위기가 좀 더 형성되길 바라는 마음에 글을 썼던 것 같아요......라고 하지만 그냥 역시 저도 쓰는 게 재밌어서.^^
 
이건 나중에 또 좀 더 생각해보고, 미국에 계신 매냐 분들께도 여쭤보고 싶은 키워드이긴 한데, 한국문화가 점점 '미국化'되어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24-04-19
22
3835
글쓰기
검색 대상
띄어쓰기 시 조건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