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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비하인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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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2 22:02:13

어제의 1에 이어 적어봅니다.


1. 선조런


선조는 신립의 대패 소식을 듣자 즉각적으로 파천을 결정, 평양으로 도주합니다. 이어 고니시가 쫓아오자

평양도 버리고 의주로 튀는데, 이는 일본군 입장에선 매우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어제 댓글로도 많은 분들이

달아주셨지만, 원래 일본에서는 선조를 최단기간에 잡아 전쟁을 끝낼 생각으로 속전속결 앞만 보고 진격을

거듭해왔는데, 막상 왕이라는 작자가 도성을 지키기는 커녕 최북단까지 도망쳐버리게 되니 벙찌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적장이 쓰러지거나 거점이 함락될 경우, 그걸로 전쟁은 끝이 나게 되는게 원칙이었고, 휘하의

백성과 군사들은 새로운 지배자에게 충성하는것이 일반적인데, 조선은 왕이라는 작자가 살겠다고 도망을

가는데도, 백성들이 왕을 원망하긴 하나 여전히 군주로 인정하고, 곳곳에서 의병이라는 일본의 입장에선

생각지도 못한 저항군들이 생겨나 전력을 분산시키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한거죠.


고니시는 평양까지 순식간에 진격했지만, 평양에 주둔하며 사태를 관망하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에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공세종말점에 도달했기에 휴식을 취해야 했다는 설이 제일 유력하고, 명의 움직임을 보려고

했다는 설, 반전주의자인 고니시가 확전을 원하지 않았다는 설등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고니시는 평양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가토는 함경도까지 올라가나 그곳에서 의병들의 저항을 받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선조는

분조(조정을 2개로 나눔)를 시행해 세자이던 광해군에게 권력을 반 이양하고, 본인은 압록강을 넘어 명으로

도주할 계획을 세우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조의 의지는 강했고, 그는 명에 사신을 보내 건너갈

의사를 타진합니다.


그러자 명은 당황하는데, 국왕이라는 작자가 저리 쉽게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타국으로 도주하겠다는

생각을 못했던 만큼, 오히려 저들이 일본과 짜고 명을 침입하려는게 아닌가 의심했으며, 상황을 파악하자

더더욱 어이가 없던 명은 선조를 받아줄 뜻이 없으며, 만일 넘어올 시 수행원을 백 명으로 제한하고,

압록강 방면에 있던 배들을 모두 요동으로 철수시켜 사실상의 축객령을 내립니다. 안절부절못하며

명의 회신을 기다리던 선조의 멘탈은 가루가 되었고, 오히려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이 최악의 상황에서

군사, 백성들과 함께 고생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받게 됩니다.


선조가 빠른 도망을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틀리지 않은 판단이었고, 만일 선조가 잡혔다면 전쟁은

거기서 이미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조는 나라를 버리고 명으로 도망치려 했고,

전쟁 내내 신임을 잃은 왕은 광해군을 미워하여 양위소동을 벌이고, 군공을 세운 장수를 시기하며

전쟁 내내 자신의 자리보전만을 생각하는 암군이 되어버립니다. 전쟁 직전의 선조의 행적을 보면

신하들을 대립시켜 본인의 권력을 강화하고, 이순신을 3품계 승진시켜 좌수사에 임명하는 용인술을

보이는 등 유능한 군주의 자질이 있었으나, 그는 임란으로 인해 후세까지 평생까임권을 받게 됩니다.



2. 조승훈, 이여송


명은 요동까지 전쟁이 확전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조선에 원군을 파병할 것을 결심합니다.

행운도 따랐는데, 당시 황제였던 만력제와 병권을 쥐고 있던 병부상서 석성이 두 사람이 모두

친조선파였기 때문에, 우선 요동 부총병이던 조승훈의 5천 병력을 파병하지만 조승훈은 당시

조선군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일본군이 얼마나 강한지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군,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무참하게 박살났고, 부장마저 전사한 채 도주해야 했습니다.


그러자 심각성을 인지한 명은 촉망받던 유능한 젊은 장수인 이여송을 중심으로, 요동 경락이던

송응창을 사령관으로 하여 4만 2천명의 군대를 파견했고, 이여송은 선조의 버선발 환영을 받으며

만명의 조선군 지원을 받아 5만명의 병력으로 고니시가 지키던 평양성을 포위, 초전에서 섣부른

공세로 피해를 보았지만, 이에 이여송은 신중하게 대포를 동원하여 선제타격을 한 후 병력을 전개,

고니시를 몰아붙였고, 고니시와의 협상을 통해 일본군을 철수시키며 평양성을 수복하는데 성공합니다.


평양성의 수복으로 사기가 크게 오른 조.명 연합군은 그대로 추격에 나서 개성을 탈환하고 나아가나

일본군 상당수가 한양에 재집결하여 결전을 준비한다는 점을 간과했고, 벽제관(지금의 독립문 일대)

에서 충돌한 조명 연합군은 일본군의 거센 반격에 한양 수복에 실패하고 패퇴, 개성으로 물러납니다.

이여송은 이후 전투의욕을 상실, 일본과의 강화를 모색하며 전투를 회피했고, 조선에선 크게 놀라

이여송에게 전투를 간청하나 이여송과 그의 군대를 이를 거부하는데, 이는 류성룡의 징비록에 자세히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전투를 회피하던 명군은 그대로 눌러앉아 현지조달을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치는데, 일본군이 얼레빗이라면 명군은 참빗이라는 유명한 표현이 여기서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명군과 이여송에게도 이럴만한 사정은 있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3. 게임에선 연옥술쓰며 패기 부렸잖아요, 그런데 왜?


이 이야기를 하려면 당시 명의 꼬라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명의 당시 황제는 만력제.

명의 4대 암군이라 불리는 F4(가정,천계,정덕,만력)중에서도 T.O.P에 해당하는 개노답 황제로,

명나라 멸망의 근본 원인으로 평가받는 역사에 남을 암군이었죠. 만력제는 48년을 즉위해 있었지만

업무 거부기간이 30년에 달할 정도로 먹고 놀기만 했으며, 신하들을 만나는 것도 거부하는 초유의

막장행각을 벌여, 정부 부처에 책임자들이 텅텅 비어 행정은 개판이었고, 군사력 역시 약화된데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명나라 상태는 최악으로 향해가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만력제는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조선을 돕는 것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그래서 별명이

고려천자였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조선에선 만동묘라는 사당을 세워 후대에도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내줬죠. 그는 자국을 위해서는 쓰지도 않던 내탕금까지 조선을 위해 사용했고,

이는 조선 입장에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황제와 병부상서가 친조선파인데도,

문제는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이를 다 알고나면 명이 욕을 많이 먹는 것이 억울해질 정도죠.


당시 명나라의 정규군은 최악의 상태였기 때문에, 유명한 장수들은 정규군 외에 따로 사병들을 두어

정예부대로 삼았습니다. 즉 정규군은 총알받이와 진형유지에 사용하면서 결정타는 정예병력인 사병을

동원하여 먹이는 형태의 전투구조였는데, 이여송이라고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이여송의 주 병력은

요동기병, 여진과 몽골 기병이 주축이 된 강력한 기마대였는데, 요동 기병을 이끌고 조선에 와보니

상황이 엄청나게 심각하게 돌아가게 됩니다.


당시 명나라는 병사들에게 은을 주어 은으로 식량을 사먹게 했는데, 나라의 행정력이 개판이다 보니

병사들에게 적절하게 보급을 해주는 것이 어려워졌고, 그러자 정부에선 민간 군수업자들, 즉 군사상인

들을 활용해 그들의 상단을 통해 보급물자를 운송하게 했고, 대가를 병사들이 받는 은으로 지급하도록

하여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막상 조선에 와보니 그 방법은 전혀 통하지 않았는데, 당시에 조선은

여전히 화폐경제가 정착되지 않은 물물교환 경제구조여서 은이 전혀 통하지 않았고, 당시 전쟁 때문에

기껏 남아있던 조선의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어 시장에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게다가 더욱 최악이었던 것은, 명나라에서 식량운송을 맡기던 군수상단들은 먼 조선땅까지 물자와

식량을 운반하는 것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며 조선까지의 운송을 거부했고, 그 쌀은 거의 대부분

요동까지만 와서 쌓였습니다. 조선에게 와서 가져가라 했음에도 조선의 능력으론 그 쌀을 가져올

방법마저 없는 상황이었고, 이에 어이가 없어진 명은 식량조달이 힘들면 정예병력인 요동 기병에게

줄 마초라도 제대로 구하라고 했으나, 마초 역시 당시 조선의 상황으로 충분히 구하는게 불가능했고,

이여송은 조선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주축이던 요동 기병의 군마중 반 이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상황에서 이여송은 화가 나 돌아가겠다 했으나 선조와 류성룡의 필사적인 만류와 부탁으로 군을

이끌었던 것이었고, 승승장구했으나 벽제관 전투에서 자신의 주축이던 요동기병 대부분을 잃어버리자,

그는 전투 의욕을 상실합니다. 일본과의 강화를 추구하며 눌러앉았고, 명군은 현지 조달이란 명목으로

백성들을 갈취하는데, 실제로 보급이 부족해 이여송은 류성룡을 몇번이나 책망했고 류성룡은 눈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당시 최악이던 조선의 상황에선 명군이 원하는 보급량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4. 그들에게도 할말은 있다


그럼에도 명군은 전쟁에서 엄청난 억제력을 발휘했는데, 일본군은 명군과 싸우는 것을 꺼려했고,

명이 가져온 화포는 그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이역만리 타국을 위해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

병사나 장군이 있을 턱이 없기에 기회가 있으면 강화를 추구하며 간을 보고, 백성들을 갈취하며

괴롭혔다는 점이 현재 임란 당시 명군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입니다만........


명으로선 답도없는 조선의 교통과 상업 때문에 보급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고, 군사를 활용하는데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전투를 피하는 것 역시 명나라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지요. 타국을 위해

목숨바쳐 싸우는 일이 과연 쉽겠나라고 묻는다면 다들 고개를 저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명군은

정유재란 당시에는 17만이 넘어 주력 병력을 담당했고, 임진왜란의 가장 큰 승리요인은 이순신

장군의 눈부신 수군공적도, 조선의 용맹한 의병도 아닌 명군의 참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명군 역시 문제가 많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 실제로 백성들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친 것은 사실이고, 자신들의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조선 민간인을 학살하는 일도 있었으며, 조선과

협동하는 것보다는 자군의 행동을 우선시하기도 했으며, 강화 역시 조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진행하며

독선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잦았고, 파병을 온 명군 군사들과 장수들은 천군이라는 명목 하에 조선의

백성,군사,신하,장군 할 것 없이 무례하기 이를데 없었다고 전해지고, 폐해도 이루 말할수 없었다 합니다.


그런 명군 장수를 복종시켜 진린을 데리고 다닌 이순신 장군은 정말 위대한 성웅입니다.



나머지 전투 진행과 선조의 막장행적은 3편에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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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Updated at 2017-02-22 22:07:54
이런 글 보니까 갑자기 인조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군요.
호란 당했다는 이유로 밑도 끝도 없이 최악의 왕으로 꼽히는 불쌍한 사람...어찌보면 선조보다 더 불쌍한 왕이죠.

영화 광해라는 졸작을 본 뒤 거품 한 번 걷어내보자는 생각으로 광해군 재평가를 주제로 졸업논문 써냈던 게 생각나네요.
1
2017-02-22 22:37:24

인조또한 어떤방법으로도 쉴드치기 힘든분입니다
외침을 당하고도 준비를 하지 않았고 망해가는 명에대한 군신관계만 신경을 썼죠
인조재임초반 반역이 일어났고 평안도에 주둔하던 군사들이 제거되면서 입구를 완전히 열어놔버렸죠
청의 기마부대에 정신못차린건 물론이고 병자호란땐 명의 해상기술을 흡수해버린 청의 전투력조차 파악을 못한겁니다 강화도가 뚫리고 세자와 왕자들이 사로잡히면서 남한산성에 짱박히다가 항복해버렸죠
훗날 청에 끌려간 세자를 왕권을 두고 라이벌로 여겼고 왕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손주들은 죽이는등 왕으로서 처신도 못한사람입니다
솔직히 전 선조나 인조의 왕명이 조로 끝나는 것도 맘에 안들고 각각 하성군과 능양군으로 격하해서 부르고 싶습니다

2
Updated at 2017-02-22 22:52:37

인조를 쉴드치자는 게 아니고 호란을 당했다는 이유로, 그러니까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계승해왔음에도 청이 자국의 불리한 사정에 못 이겨 주도적으로 일으킨 호란의 책임을 뒤집어쓰며 최악의 왕에 꼽히며 공격받는다는게 맘에 안 든다는 뜻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린이용 만화책에서나 나오는 친명배금 하니까 청태종이 삐꺼솟해서 조선을 침략했다는  인과구조 말이죠.

인조가 광해군에 비해 모문룡에 대한 대처를 못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광해군의 기존 등거리 외교정책을 계승하지 않은 건 아니었씁니다. 문제는 청나라가 자국의 식량난과 인구부족 해결을 위해 온갖 무리한 요구를 해댔고 조선은 허리가 휘어지도록 이를 감당해야했습니다. (누르하치의 반란 후 명은 교역관계를 끊어버리고 후금은 아사직전에 몰립니다. 저는 사르후 전투는 사실상 누르하치의 최후의 발악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허용한 부분이나 광해군보다 모문룡에 대한 대처를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광해군 재위기보다 외교적 상황이 훨씬 불리했던 게 사실인데 호란을 허용했다는 이유로 조선시대 사극을 기사로 한 댓글마다 최악의 왕 소리 듣는 건 진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Updated at 2017-02-23 00:09:24

반정세력에 만들어진 왕권이고 전통성의 약점도 가진 왕이란 한계정도가 최대 방어수단이라고 봐요  

피할 수 없는 호란이라지만 두번째 병자호란땐 대비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청의 입장에서 조선은 약속을 어긴나라입니다 청의 사신을 무시하고 청에간 사신들또한 무례한 모습을 보였고 돌아오는길에 조작까지 했죠  
전쟁이후 인조와 그 대신들은 전후처리는 선조만도 못했습니다 선조땐 전쟁이후 끌려간 조선인들을 데려오려는 노력한 흔적이라도 보이나 인조때 잡혀간 조선인중 양반의 자재들이 비싼값에 돌아오는 것에 사실상 방관만 했죠 
이와비슷한 패널티에서 고려때 서희는 외교적 담판으로 오히려 영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인조와 반정세력은 무엇을 했습니까? 명과의 사대에만 메달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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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7-02-22 23:17:37
말씀하신 거 들으니까 완전 그 당시 시대상을 무시하시고 너무 후손들의 관점에서 비판만 하시네요. 헛웃음만 나옵니다.

그리고 저는 인조대의 수많은 일 가운데 호란의 원인을 인조 혼자 뒤집어쓰는 이 새태가 불만족스러워서 그 오해만 풀고자 말씀을 드렸는데도 글쓴님께서는 제가 언급도 안한 엉뚱한 곳만 공격하시는군요. 사후대책은 제가 말도 안 한 부분이지만 일단 쓰셨으니 말하자면 서희는 요를 설득한 상태였고 병자호란은 완전 참패한 상태에서 겨우 강화를 맺고 우리가 뭘 요구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완전 상황을 오판하고 쓰셨네요. 

근데 서희가 여요전쟁 후 영토확장한 거랑 인조가 병자호란을 허용한 거랑 뭔 상관인데요? 저 혼란시키려고 넣은 건가요??

애초에 광해군과 인조의 외교정책이 양쪽을 다 만족시키지 못하는 외교정책이었구요. 우리가 그걸 과대평가해서 그냥 만화책에 중립외교 이렇게 써놓는거랍니다. (일단 전쟁을 막았으니 당연히 긍정적으로 판단하지만 광해군이 쭉 집권했으면 호란이 없었느니 하면서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광해군은 그냥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한테 명이 끊어준 교역체계 우리가 해줄테니 우리 침략하지 말아달라!! 이래서 전쟁을 막은 거구요. 인조도 그걸 계승해왔음에도 청이 자국의 사정을 못 이겨내고 그냥 조선을 침략한 겁니다. 무슨...

청의 입장에서 조선은 약속을 어겨요?? 조선의 입장에서 청은 덩치 크다고 갑질하는 깡패입니다.
1
Updated at 2017-02-23 00:32:32

병자호란이 인조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어도 지분으로 따지면 대주주 정도의

위치 아닌가요?
이미 정묘호란에서 청의 그것도 본군이 아닌 3만의 병력에 이미 털리대로 털리면서 군사적으로는 상대가 안되는 것을 이미 경험 하였습니다.
물론 청나라가 병자호란전에 보인 행동은 대놓고 조선에게 도발이나 다름 없었지만 그에 대한 대처가 최악이었습니다.
청나라가 다시 전쟁을 결심하고 바로 온 것도 아니고 최후통첩을 하자
처음에는 눈이 뒤집혀서 전쟁을 하자면서 강경론을 내세우다가 최명길등의 신하들의 현실론의 반박을 먹고 현실은 인지 했지만 7개월 동안 내내 화해조서를 누가 가져갈지 토론만 하고 아무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겨우 처음부터 화의를 주장한 박로가 가기로 결정됬지만
이미 청군은 압록강을 넘은 뒤구요.
깡패랑 당장 맞설 힘이 있으면 당연히 싸워 이기는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바른 방법이지만 이미 그 깡패한테 싸워서 상대가 안되는 것을 경험하고
아직 다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 도발당한다고 울컥해서 먼저 싸우자 해놓고
싸움을 피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다가
결국 죽기 직전까지 맞고 항복한 경우입니다.
거기에다 현실이라면 자기 혼자 깡패한테 다치지만 전쟁의 참혹함은 백성들이 대부분 감당하게 되었구요.


2017-02-23 00:54:28

아 이걸 깜빡했네요. 호란의 원인을 청 입장에서만 생각하다보니 놓쳤습니다.

기승전친명배금이라는 기존의 인식을 엎으려다보니 도리어 세세한 걸 놓쳤습니다.
놓친 걸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2017-02-23 00:46:33

조선에게 청이나 명은 갑질하는 깡패인건 똑같습니다. 말씀하신 그 모문룡은 갑질을 넘어 노략질수준이었으니까요. 


애초에 후금은 조선을 복속하겠단 뜻은 없었습니다. 후금의 야욕이 일어나는건 점차 팽창해가는 본인들의 힘이 강성해지면서 조선에게 군신관계를 요구하는 것이고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와 세력은 용납을 못한거죠. 

저도 호란은 피할 수 없었을거란 말엔 동의합니다. 누가 왕이던간에 청태종은 굉장히 호전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죠.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조선을 일단 밟아놓고 명나라를 복속하기 위해 국력을 쏟을게 분명하니까요. 애초에 제가 문제를 제기한건 전란을 겪고도 반성한거 같지 않은 조선의 태도고 당연히 그 책임은 지도자가 짓는것이 맞다고 생각을 합니다.  

청이 쳐들어올껄 감지했다면 국방을 강화했어야 했습니다. 임란후 척박해진복구할것이 많은 국내사정을 정말 제대로 인지하고 청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것을 알았으면 그에 맞는 처신이라도 했어야죠. 청이 쳐들어오자 왕이 겁을 먹고 강화도로 도망갈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요?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잖아요. 어쩌다보니 왕은 가지 못해 남한산성에 짱박혔는데 옛날처럼 강화도로 피신만하면 이또한 피할 수 있으리란 안일한 생각을 한것이죠. 하지만 명의 선박기술을 취득한 청나라는 너무나도 쉽게 강화를 점령하고 왕세자를 비롯한 왕가의 자손들과 신하들을 인질로 붙잡히잖아요. 그냥 상대의 전력조차 모르고 맥없이 당한겁니다. 비판받아야죠. 

물론 열심히 싸운 병장들도 있었지만 말론 청과 결사로 싸우겠단 척화세력들은 다른쪽에서 도망갈 구실만 했습니다. 누구보다도 빨리강화도로 피신을 했던것이죠. 그 사람들을 조정의 대신으로 쓴것도 결국엔 인조입니다. 쓸수밖에 없었겠죠. 그들이 추대한 왕이었으니 전통성은 미약했으니까요. 
 
전란의 책임에 인조는 책임을 지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말했던 소현세자와의 쓸데없는 갈등을 벌였으며 그와중에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빈과 손자들을 유배보내고 사실상 죽게 내버려둔 것이 왕의 행실이라고 보기엔 적절치가 않아요. 이유가 말이 안되잖아요. 그 시대의 대표인물들중 물론 훌륭한 분들도 많지만 김자전 소용조씨 이귀 김류같은 간신들이 고관자리를 차지하니 왕의 용인술에 비판을 하지 않을 수도 없죠.  
    
Updated at 2017-02-23 00:54:56
애초에 제가 문제를 제기한건 전란을 겪고도 반성한거 같지 않은 조선의 태도고 당연히 그 책임은 지도자가 짓는것이 맞다고 생각을 합니다.  
--> 그럼 애초에 님 의견을 저한테 말씀하실게 아니라 따로 글을 쓰시면 됐네요. 저는 호란의 원인을 전적으로 인조한테 덮어씌우는 건 부당하다는 취지에서 쓴 거니까
제 말은 인조 비판 안 하자는 거 아닙니다. 그리고 소현세자니 전후 대책이니 뭐니 첨부터 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2017-02-23 13:20:58

인조의 병자호란 가장 큰 문제는 북방군을 이괄의 난때 갈아버린거죠.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 놓고는 당파싸움으로 갈어버렸죠. 최소한 그 북방군이 있었으면 그렇게 쾌속진격은 안되었겠죠. 물론 있다고 억제능력까지는 없었겠지만 왕자들 볼모로 잡히는 일까지는 안일어나고 물러났을수도 있다고 봅니다.

2017-02-22 23:32:21

임란 당시 조선은 동아시아 기준으로도 상업이 너무 낙후되어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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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7-02-23 00:30:24

저는 고니시가 평양에서 멈춘 것은 보급 문제가 제일 크다고 봅니다. 상륙 침공은 현대에 와서도 매우 어려운 작전입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까지 바이킹식 약탈을 제외하고 대군이 상륙 침공작전을 성공했다는 사례가 기억이 안나는군요. (아 정복왕 윌리엄이 있군요.) 그 페르시아도 그리스 침공 때 살라미스를 못 넘었는데 말이죠. 

2차 세계대전 때에도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엄청난 보급체계와 이를 실어나르는 엄청난 차량, 그리고 물품 생산을 필요로 했습니다. 1944년 당시 유럽에는 이미 산업화가 이미 상당하게 진행 되어 나름 철도와 도로가 닦였는데도 불구하고 프랑스를 넘어서자 너무 긴 보급로에 한계를 느끼게 되어 진군이 멈추게 되었고, 추가 전진을 하기 위해서 노르망디 항구로도 모자라서 엔트워프 항구가 추가로 필요하였고 이 항구를 역으로 먹어 협상하고자 히틀러가 발지 대 공세를 벌인 계기도 되었죠. 그마만큼 대군을 바다로 상륙을 시켜 점령작전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고 1944년에는 미국이라는 유례없는 산업대국의 생산력과, 영국의 오랜 식민지 점령역사를 통하여 배운 노하우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렇기에 사실상 당시 16세기 일본으로써는 보급기술의 부족으로 조선을 넘어 명을 정복하기에는 불가능했엇다고 봐야 합니다. 

임란 당시에도 일본-대마도-부산으로 배를 통하여 험한 바다를 건너 보급품을 전달해야 했고, 다시 여기서 달구지로 산넘고 강건너 평양까지 운반 한다는 것이 당시로써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죠. 냉장 유통도 안 되던 시절이라 전달할 식량이래 봤자 쌀이 전부였습니다. 또한 조총이 주 무기인 일본군 입장에서는 본국으로부터 화약과 탄약을 보급 받지 못하면 전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평양에서 일본군이 겪은 겨울은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평생 못 겪어본 추위였고, 동계전투를 위한 동복 또한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었죠. 이러니 병사들이 더 이상 진군할 사기가 안 되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이 때부터 사야가 같은 투항 왜군들도 생겨나기 시작했고요. 사실 이런 세계역사에도 전례가 없는 상륙작전을 펼친 일본 입장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복기를 해보자면 진군은 서울까지만 하고, 그 다음 전라도를 먹고, 전라도를 곡창지대로 삼아서 서둘러 가을 추수를 한다음에 군량미를 쌓아놓고 서서히 그곳에서 보급을 받아 2차 진군 동력을 얻어야 했죠.  
물론 일본이 이러한 시도를 안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1차 진주성 전투에서의 패배와 이치 전투 패배로 1차 전라도 공략은 실패로 돌아 갔고, 정유재란 때는 이번에는 임란 때의 과오를 확실히 복기하여 전라도 부터 철저하게 정복하지만, 명량해전 패배로 일본군은 전의를 완전 상실하게 되었고 명라나군대와 조선군도 예전보다 강해져 있었죠. 정말 전쟁이란 한발만 늦어도 패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쟁의 역사를 보면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히틀러의 러시아 침공, 한니발의 로마 침공 모두 이런 보급과 종심력 소멸이라는 문제 때문에 패배하였습니다. 선조가 실제로 본인이 의도했을리는 없겠지만 결과적으로만 보면 전략적으로 매우 천재적인 무브를 보여준게 된 것이죠. 마치 투우를 할 때 소를 유인 한 다음에 옆구리를 칼로 찌르듯한 이러한 전술은 정말 역사에는 천재들만 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2017-02-23 00:55:29

평양성에 멈춘건 보급도 문제지만 스스로 자각을 한것이겠죠. 소문도 충분히 들었을겁니다. 혹시모를 명의 개입이 있을지 모르는 판에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을겁니다. 어찌보면 굉장히 실리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때 조선으로서도 시간도 벌었을겁니다. 이때부터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상태는 벗어났죠. 또 우리민족이 위기에 몰리면 뭉치는 그런 질긴 면이 있잖아요. 곳곳에서 잡초같은 민초들이 적극개입하면서 굉장히 피곤했을겁니다. 그들과 애초에 민족성이 다른데 그걸 몰랐으니까요 

1
Updated at 2017-02-23 11:33:52

전쟁사는 잘 모르지만 한국전쟁 때도 이 문제가 있었더군요


한반도의 지형이 남쪽에서 시작해서 평양까지는 잘록한 허리모양이지만

평양 북쪽으로는 양쪽으로 전선이 급격히 벌어지는 관계로

진군하는 군단의 좌우가 비게되는 문제가 생긴다고

그래서 미군도 올라가다 중공군에게 밤사이 포위를 당하는 일들이 벌어졌다고

하는 책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조선은 대체 상업수준이 왜 저 모양이었는지 참 미지수입니다

잉여생산물이 없어서 그랬나...

2
2017-02-23 12:08:42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에 맥아더 장군과 연합군은 룰루랄라 누가 먼저 깃발을 꽃느냐 전공을 세우기 위해 서로 경쟁하였고, 군대가 횡대로 진군하는 게 아니라 각 사단별로 흩어져서 종대로 나무 가지 모양으로 진군하였습니다. 이를 간파한 중공군(중국군)이 땅굴을 파고 몰래 침투하여 연합군의 각 사단들의 후미를 이미 포위하고 있었죠. 이 때 쌈싸먹히는 대공세를 연달아 몇차래 당해서 미 해병대가 역사상 최악의 패전을 기록하는 등... 쭉 서울 아래까지 밀렸습니다.

이후 맥아더 다음 사령관으로 부임한 릿지웨이는 각 사단끼리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진하는 마치 고대 로마군이 서로 방패를 맞대고 전진하는 방식을 취해 중공군의 쌈싸임을 방지하죠. 한반도가 지도상으로는 짧아보여도 전부 산과 강이라 진군하기 매우 어려운 지형입니다. 임란 때도 이순신이 없었으면 일본도 한국전쟁의 맥아더 처럼 인천이나 한강을 통해서 2차 상륙작전을 했을 것입니다. 

조선은 상업이 없죠. 무역이라고는 중국 사절단 갈 때 따라가는 상인이 전부인데요. 조선의 경제는 농업인데, 전쟁통에 추수도 제대로 못했고 식량은 바닥 났죠. 일본군이 약탈을 하려고 해도 할 게 없었죠. 그래서 정유재란 직전 휴전 때 이순신 장군은 군사들을 동원해 농사를 짓는 둔전제도 시행했는데, 이를 조정에서는 '니가 나라 행정까지 하냐?'며 갑질 했죠. 
2
2017-02-23 05:02:58

이래서 제조만, 제한만 하는 거죠.
제발 조선인이면 만력제 욕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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