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비하인드(2)
어제의 1에 이어 적어봅니다.
1. 선조런
선조는 신립의 대패 소식을 듣자 즉각적으로 파천을 결정, 평양으로 도주합니다. 이어 고니시가 쫓아오자
평양도 버리고 의주로 튀는데, 이는 일본군 입장에선 매우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어제 댓글로도 많은 분들이
달아주셨지만, 원래 일본에서는 선조를 최단기간에 잡아 전쟁을 끝낼 생각으로 속전속결 앞만 보고 진격을
거듭해왔는데, 막상 왕이라는 작자가 도성을 지키기는 커녕 최북단까지 도망쳐버리게 되니 벙찌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적장이 쓰러지거나 거점이 함락될 경우, 그걸로 전쟁은 끝이 나게 되는게 원칙이었고, 휘하의
백성과 군사들은 새로운 지배자에게 충성하는것이 일반적인데, 조선은 왕이라는 작자가 살겠다고 도망을
가는데도, 백성들이 왕을 원망하긴 하나 여전히 군주로 인정하고, 곳곳에서 의병이라는 일본의 입장에선
생각지도 못한 저항군들이 생겨나 전력을 분산시키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한거죠.
고니시는 평양까지 순식간에 진격했지만, 평양에 주둔하며 사태를 관망하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에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공세종말점에 도달했기에 휴식을 취해야 했다는 설이 제일 유력하고, 명의 움직임을 보려고
했다는 설, 반전주의자인 고니시가 확전을 원하지 않았다는 설등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고니시는 평양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가토는 함경도까지 올라가나 그곳에서 의병들의 저항을 받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선조는
분조(조정을 2개로 나눔)를 시행해 세자이던 광해군에게 권력을 반 이양하고, 본인은 압록강을 넘어 명으로
도주할 계획을 세우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조의 의지는 강했고, 그는 명에 사신을 보내 건너갈
의사를 타진합니다.
그러자 명은 당황하는데, 국왕이라는 작자가 저리 쉽게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타국으로 도주하겠다는
생각을 못했던 만큼, 오히려 저들이 일본과 짜고 명을 침입하려는게 아닌가 의심했으며, 상황을 파악하자
더더욱 어이가 없던 명은 선조를 받아줄 뜻이 없으며, 만일 넘어올 시 수행원을 백 명으로 제한하고,
압록강 방면에 있던 배들을 모두 요동으로 철수시켜 사실상의 축객령을 내립니다. 안절부절못하며
명의 회신을 기다리던 선조의 멘탈은 가루가 되었고, 오히려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이 최악의 상황에서
군사, 백성들과 함께 고생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받게 됩니다.
선조가 빠른 도망을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틀리지 않은 판단이었고, 만일 선조가 잡혔다면 전쟁은
거기서 이미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조는 나라를 버리고 명으로 도망치려 했고,
전쟁 내내 신임을 잃은 왕은 광해군을 미워하여 양위소동을 벌이고, 군공을 세운 장수를 시기하며
전쟁 내내 자신의 자리보전만을 생각하는 암군이 되어버립니다. 전쟁 직전의 선조의 행적을 보면
신하들을 대립시켜 본인의 권력을 강화하고, 이순신을 3품계 승진시켜 좌수사에 임명하는 용인술을
보이는 등 유능한 군주의 자질이 있었으나, 그는 임란으로 인해 후세까지 평생까임권을 받게 됩니다.
2. 조승훈, 이여송
명은 요동까지 전쟁이 확전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조선에 원군을 파병할 것을 결심합니다.
행운도 따랐는데, 당시 황제였던 만력제와 병권을 쥐고 있던 병부상서 석성이 두 사람이 모두
친조선파였기 때문에, 우선 요동 부총병이던 조승훈의 5천 병력을 파병하지만 조승훈은 당시
조선군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일본군이 얼마나 강한지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군,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무참하게 박살났고, 부장마저 전사한 채 도주해야 했습니다.
그러자 심각성을 인지한 명은 촉망받던 유능한 젊은 장수인 이여송을 중심으로, 요동 경락이던
송응창을 사령관으로 하여 4만 2천명의 군대를 파견했고, 이여송은 선조의 버선발 환영을 받으며
만명의 조선군 지원을 받아 5만명의 병력으로 고니시가 지키던 평양성을 포위, 초전에서 섣부른
공세로 피해를 보았지만, 이에 이여송은 신중하게 대포를 동원하여 선제타격을 한 후 병력을 전개,
고니시를 몰아붙였고, 고니시와의 협상을 통해 일본군을 철수시키며 평양성을 수복하는데 성공합니다.
평양성의 수복으로 사기가 크게 오른 조.명 연합군은 그대로 추격에 나서 개성을 탈환하고 나아가나
일본군 상당수가 한양에 재집결하여 결전을 준비한다는 점을 간과했고, 벽제관(지금의 독립문 일대)
에서 충돌한 조명 연합군은 일본군의 거센 반격에 한양 수복에 실패하고 패퇴, 개성으로 물러납니다.
이여송은 이후 전투의욕을 상실, 일본과의 강화를 모색하며 전투를 회피했고, 조선에선 크게 놀라
이여송에게 전투를 간청하나 이여송과 그의 군대를 이를 거부하는데, 이는 류성룡의 징비록에 자세히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전투를 회피하던 명군은 그대로 눌러앉아 현지조달을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치는데, 일본군이 얼레빗이라면 명군은 참빗이라는 유명한 표현이 여기서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명군과 이여송에게도 이럴만한 사정은 있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3. 게임에선 연옥술쓰며 패기 부렸잖아요, 그런데 왜?
이 이야기를 하려면 당시 명의 꼬라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명의 당시 황제는 만력제.
명의 4대 암군이라 불리는 F4(가정,천계,정덕,만력)중에서도 T.O.P에 해당하는 개노답 황제로,
명나라 멸망의 근본 원인으로 평가받는 역사에 남을 암군이었죠. 만력제는 48년을 즉위해 있었지만
업무 거부기간이 30년에 달할 정도로 먹고 놀기만 했으며, 신하들을 만나는 것도 거부하는 초유의
막장행각을 벌여, 정부 부처에 책임자들이 텅텅 비어 행정은 개판이었고, 군사력 역시 약화된데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명나라 상태는 최악으로 향해가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만력제는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조선을 돕는 것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그래서 별명이
고려천자였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조선에선 만동묘라는 사당을 세워 후대에도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내줬죠. 그는 자국을 위해서는 쓰지도 않던 내탕금까지 조선을 위해 사용했고,
이는 조선 입장에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황제와 병부상서가 친조선파인데도,
문제는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이를 다 알고나면 명이 욕을 많이 먹는 것이 억울해질 정도죠.
당시 명나라의 정규군은 최악의 상태였기 때문에, 유명한 장수들은 정규군 외에 따로 사병들을 두어
정예부대로 삼았습니다. 즉 정규군은 총알받이와 진형유지에 사용하면서 결정타는 정예병력인 사병을
동원하여 먹이는 형태의 전투구조였는데, 이여송이라고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이여송의 주 병력은
요동기병, 여진과 몽골 기병이 주축이 된 강력한 기마대였는데, 요동 기병을 이끌고 조선에 와보니
상황이 엄청나게 심각하게 돌아가게 됩니다.
당시 명나라는 병사들에게 은을 주어 은으로 식량을 사먹게 했는데, 나라의 행정력이 개판이다 보니
병사들에게 적절하게 보급을 해주는 것이 어려워졌고, 그러자 정부에선 민간 군수업자들, 즉 군사상인
들을 활용해 그들의 상단을 통해 보급물자를 운송하게 했고, 대가를 병사들이 받는 은으로 지급하도록
하여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막상 조선에 와보니 그 방법은 전혀 통하지 않았는데, 당시에 조선은
여전히 화폐경제가 정착되지 않은 물물교환 경제구조여서 은이 전혀 통하지 않았고, 당시 전쟁 때문에
기껏 남아있던 조선의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어 시장에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게다가 더욱 최악이었던 것은, 명나라에서 식량운송을 맡기던 군수상단들은 먼 조선땅까지 물자와
식량을 운반하는 것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며 조선까지의 운송을 거부했고, 그 쌀은 거의 대부분
요동까지만 와서 쌓였습니다. 조선에게 와서 가져가라 했음에도 조선의 능력으론 그 쌀을 가져올
방법마저 없는 상황이었고, 이에 어이가 없어진 명은 식량조달이 힘들면 정예병력인 요동 기병에게
줄 마초라도 제대로 구하라고 했으나, 마초 역시 당시 조선의 상황으로 충분히 구하는게 불가능했고,
이여송은 조선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주축이던 요동 기병의 군마중 반 이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상황에서 이여송은 화가 나 돌아가겠다 했으나 선조와 류성룡의 필사적인 만류와 부탁으로 군을
이끌었던 것이었고, 승승장구했으나 벽제관 전투에서 자신의 주축이던 요동기병 대부분을 잃어버리자,
그는 전투 의욕을 상실합니다. 일본과의 강화를 추구하며 눌러앉았고, 명군은 현지 조달이란 명목으로
백성들을 갈취하는데, 실제로 보급이 부족해 이여송은 류성룡을 몇번이나 책망했고 류성룡은 눈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당시 최악이던 조선의 상황에선 명군이 원하는 보급량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4. 그들에게도 할말은 있다
그럼에도 명군은 전쟁에서 엄청난 억제력을 발휘했는데, 일본군은 명군과 싸우는 것을 꺼려했고,
명이 가져온 화포는 그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이역만리 타국을 위해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
병사나 장군이 있을 턱이 없기에 기회가 있으면 강화를 추구하며 간을 보고, 백성들을 갈취하며
괴롭혔다는 점이 현재 임란 당시 명군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입니다만........
명으로선 답도없는 조선의 교통과 상업 때문에 보급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고, 군사를 활용하는데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전투를 피하는 것 역시 명나라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지요. 타국을 위해
목숨바쳐 싸우는 일이 과연 쉽겠나라고 묻는다면 다들 고개를 저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명군은
정유재란 당시에는 17만이 넘어 주력 병력을 담당했고, 임진왜란의 가장 큰 승리요인은 이순신
장군의 눈부신 수군공적도, 조선의 용맹한 의병도 아닌 명군의 참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명군 역시 문제가 많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 실제로 백성들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친 것은 사실이고, 자신들의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조선 민간인을 학살하는 일도 있었으며, 조선과
협동하는 것보다는 자군의 행동을 우선시하기도 했으며, 강화 역시 조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진행하며
독선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잦았고, 파병을 온 명군 군사들과 장수들은 천군이라는 명목 하에 조선의
백성,군사,신하,장군 할 것 없이 무례하기 이를데 없었다고 전해지고, 폐해도 이루 말할수 없었다 합니다.
그런 명군 장수를 복종시켜 진린을 데리고 다닌 이순신 장군은 정말 위대한 성웅입니다.
나머지 전투 진행과 선조의 막장행적은 3편에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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