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비하인드(1)
프리톡을 보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글을 보고 문득 생각나서 써 봅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에서 있었던 일들 중 무심코 넘어가는 것들에 대해 비하인드를 써보려합니다.
한국사 1급 소지자이지만 아마추어이고 비전공자인만큼,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양해 바라며
수정할 부분에 대한 지적과 의견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1. 조선은 전쟁 준비를 하지 않다가 일본의 습격에 당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조선에서 일본의 습격을 예상 못한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에
있었던 세 차례의 왜변 이후, 특히 1555년의 을묘왜변 이후 조선 조정은 일본의 침략 위험성을 인식했고,
그에 대비해 많은 전략을 강구하는 동시에 대부분의 전쟁 대비를 삼남(충청,전라,경상)에 집중시켰고,
그 중에서도 특히 경상도 지역에 공을 들였습니다. 특히 대마도에서 주로 출몰하던 왜구들의 주 경로인
경상우도와 전라도 쪽만 수비를 강화하는 것이 아닌, 경상좌도에도 방비를 크게 강화하였으며, 심지어
유생들마저 동원하여 축성을 실시하고 성곽을 보수하는 등 노력을 기울여, 지방 양반들은 이에 반발하여
조정에 항의하는 등, 조선이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고, 붕당으로 서인/동인이 갈라져 통신사로 갔던 둘의
의견이 달라, 조정이 이를 간과하다 순식간에 밀렸다는 것은 허구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이전에는 그렇게 서술되었던데다가 수능 위주 입시교육에서 이를 다루지 않기에 모르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선이 전쟁 초기 그렇게 밀렸던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군의
규모를 잘못 파악했다는 것으로, 왜군의 규모를 만명에서 많아야 수만명 정도로 예상했으며, 이는
당대 예상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정도롤 일본의 대규모 침입이 있었던 때는 여말선초의
왜구 침입, 가장 가깝게는 을묘왜란이었기 때문에 이를 참고해 전략을 세운 조선의 입장에서, 일본이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할 것이라곤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 큰 실책이었습니다. 게다가 준비는 했지만
오랜 국정의 혼란과 국정의 문란으로 정군의 규모는 실제에 비해 적었고, 훈련도 모자랐던 조선군과
달리, 일본군은 전국시대의 혼란기에 수없는 전쟁을 통해 단련된 병력이 건너왔고, 결과는 예상하듯
초기의 연이은 대패로 이어졌습니다.
2. 조선의 패배는 일본의 총력전 때문이다?
이것도 사실과는 다릅니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이 대패한 것에는 일본은 총력전으로 왔으나
조선은 그렇지 않았다라는 말이 많은데, 일본은 20만 안팏의 군대를 동원했지만 대부분 히데요시
본인에게 종속적인 다이묘의 군대를 동원했고, 대부분 서일본의 다이묘들이 투입되었으며, 전국시대
명성을 떨치던 지휘관들은 대부분 본토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는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긴 했으나
여전히 적대적인 세력이 남아있고, 히데요시에 위압을 느껴 겉으로만 복종한 다이묘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으로, 대표적인 것이 간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죠.
실제로 히데요시는 전쟁이 진행되는 도중 본인이 직접 건너가 군을 지휘하는 것을 원하기도 했고,
자신의 심복이자 2인자인 마에다 토시이에를 파견하려고도 했으나, 도쿠가와가 어찌 나올지 몰라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도쿠가와를 조선으로 파견시키는 것 역시 고려했으나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도쿠가와는 임진왜란 당시 군량과 물자를 지원하는 것만 했을 뿐, 병력은 간토의 치안 유지라는
명목 하에 파병하지 않았으며(이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과의 통상관계를 비교적 쉽게 회복함),
그 외 동일본의 다이묘들은 상당수가 동원되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데요시 본인이 동원가능한 병력이 당시 일본 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30만 가량이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을 파병한 것으로 보아 히데요시 본인으로선 최소한의 수비병력만을 남긴채 임란에 전력을
다한 것은 사실입니다. 히데요시는 조선 정복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하고 적대적인 다이묘들을
찍어누를 수 있는 이득을 보고자, 조선 정벌에 엄청난 공을 들였습니다.
3. 신립의 배수진, 탄금대 전투의 대패.
일본군이 부산진에 상륙한 이후, 그들은 파죽지세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조선은 그때까지도
상황파악이 덜 되어있는 상태였으나, 당시 최고의 명장 중 한명이라 평가받던 이일을 보내 이를
막으려 했으나 이일은 상주에서 일본군의 가토에게 패했고, 그제서야 심각성을 인지한 조선 조정은
북방에서 명성을 떨치던,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 불리는 신립을 파견했으나, 신립은 험준한 조령,죽령을
피하고 탄금대 전투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웠고 일본군의 조총에 대패하여 자결하였다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인식이지요.
신립은 북방에서 여진을 상대로 공적을 쌓아올린 장군으로, 그의 정예병 주축은 북방에서 활약하던
기마궁수, 궁기병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중기병이 없기 때문에 충격력이 빈약했고, 신립이 지원받은
군사들의 상태는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나빴다고 합니다. 이에 배수진을 쳐서 병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설이 있고, 또 다른 설로는 기병을 운용하기에 편한
탄금대를 전장으로 삼았다는 설도 있는데, 제 생각으로는 아마 후자 쪽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립 입장에서도 자신이 가장 자신있는 기병을 통한 기동전을 선호했을 것이고, 본인이 이겨왔던
그 방법을 통해 일본군 역시 무찌를 수 있을 것이라 보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알려진 것처럼 조총이 아닌 전장 상황이 문제였습니다.
일본군은 모두 조총으로 무장한 것이 아니라 보급률이 20% 정도에 불과했고, 알려진 것처럼
조선군은 조총 사격에 배수진이라 피하지 못해 참패한 것이 아니며, 백병전으로 대패한 것도 아닙니다.
탄금대 전투 당일에는 큰 비가 내렸고, 다들 아시다시피 비가 오면 땅이 질척거려 기병을 운용하기
매우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기병대 돌격이 최악의 지면상태와 일본군의 대응으로 인해 차단되자
조선군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이를 포착한 일본군의 조직적인 대응에 조선군은 지리멸렬하게 패주,
이 때문에 한성과 충주 사이에 있는 병력은 사라졌고 일본군은 엄청나게 빠르게 진격하게 됩니다.
신립은 이 패배로 인해 무능한 장수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지만, 사정을 보면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어떠한 명장이라도 자신의 장기가 막히면 전쟁을 이기기에는 어려우니까요. 본인은 최선을 다했지만
져서는 안되는 싸움에서 진 지휘관인 만큼 평가도 가혹한 것 같습니다.
4. 수군, 수군, 수군!
처참하게 박살나던 육군과는 달리 수군은 상황이 좀 나아서, 임란 발발 당시 답이 없던 육군 편제에
비해 수군은 그나마 5만 4천명이라는 정원의 절반이 넘는 3만명의 병력과 충분한 규모의 전선을
갖추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었던 건 역시 일본과 제일 가까운 경상도에 위치한
경상우수영&경상좌수영으로 180척을 보유하고 있었고, 전라좌수영&우수영은 70척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 발발 직후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을 맡던 박홍과 원균(!!!)의 졸렬한 대처로
수군 전력의 2/3을 날려먹었고, 특히 가장 규모가 크고 정예였던 경상우수영의 수군을 거느렸던
원균은 수군해체(:::)라는 막장짓을 시전하며 신이 조선에 이순신 장군을 내린 것에 대한 밸런스
패치를 거하게 실행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웅 갓순신께서는 본인이 길러낸 정예병과 우수한 장교들과 함께 일본 수군을
쳐부쉈고, 그 쳐부순 상대들은 일개 무명이나 허접들이 아닌 일본 내에서도 수군 지휘에 유능하다
평가받는 장군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압도적인 교환비로 일본 수군을 계속 박살내
일본군의 기본 대전략이던 수륙병진을 좌절시켰고, 일본군은 보급난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이 특히 빛나는 것은, 다름아닌 박홍과 원균이라는 무능한 지휘관들이 조선
수군의 핵심이던 경상도 수군을 말아먹었기 때문이며,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눈부신 성과를 낸
이순신 장군은 더더욱 추앙해야 마땅합니다. 원균 명장설은 이걸로 기각할 수 있는 희대의 x소리고요.
5. 전라도는 왜 무사했는가?
일본의 기본 전략은 선조를 잡자였고, 그때문에 뒤에 있는 병력을 무시하고 앞으로만 내달리다 보니
점령지에서도 소요가 잦은데다 그 잡을 대상인 선조가 도망가면서, 일본군의 전략은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보급선이 엄청나게 길어졌기에 보급이 필요한데, 보급의 핵심이던 수군이 이순신 장군에게
족족 완파당하면서 수륙병진이 좌절되었고,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저항하며 전력이 분산되었으며,
명군이 구원하러 올 것이라는 소식이 들리자 일본군 역시 이에 바짝 긴장하여, 그동안 돌아보지 않던
조선 최고의 곡창지대, 전라도를 노렸으나, 전라도를 노렸던 가장 큰 시도 둘이 좌절되며, 전라도는
전쟁 초기 무사하게 됩니다. 하나는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는 김시민 장군의 진주성 전투이며,
또 하나는 권율의 이치 전투로, 이치 전투의 승리로 인해 일본의 전라도 침공은 막히게 됩니다.
이치에서 승전을 이끌어낸 권율은 먼후에 조선의 도원수로 군을 총괄하게 됩니다. 권율의 공적에
행주대첩이 워낙 유명하여 잊혀졌지만, 저는 이치전투가 권율이 세운 가장 큰 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2편은 명의 참전과 전쟁 진행과정에 있었던 일을 적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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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드라마 옥중화를 보니 알겠더라구요 전지전능 옥녀가 죽어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거라 유추해봅니다
임란은 일본이 파죽지세로 평양성까지 올라가고 조선이 정비할 시간이 주어지면서 일본의 한반도전체의 정복은 1차적으로 차단되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빨빠진 명이라지만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겠죠
말씀처럼 일본은 선조를 잡는걸 목적으로 최대한 빨리 북진하는걸 목표로 하다보니 뒷정리를 잘 못한면도 있죠 그러니 저항군의 항전이 많았고 후방이 귀찮았을겁니다
전쟁준비에 대해서 소홀한건 맞다고 봅니다 이후 두차례 호란을 봐도 후회는 하고 반성을 하지 않은게 확 티가 났으니까요 선조는 해군을 없애려 시도까지 한 왕입니다 그리고 일본병력을 기만했던 거죠 왕도 문제였지만 주변의 위정자들이 당리당략에 따라 정치를 했고 선조도 본인이 후궁출신이란 자격지심도 있었다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