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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비하인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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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7-02-22 00:00:59

프리톡을 보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글을 보고 문득 생각나서 써 봅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에서 있었던 일들 중 무심코 넘어가는 것들에 대해 비하인드를 써보려합니다.

한국사 1급 소지자이지만 아마추어이고 비전공자인만큼,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양해 바라며

수정할 부분에 대한 지적과 의견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1. 조선은 전쟁 준비를 하지 않다가 일본의 습격에 당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조선에서 일본의 습격을 예상 못한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에

있었던 세 차례의 왜변 이후, 특히 1555년의 을묘왜변 이후 조선 조정은 일본의 침략 위험성을 인식했고,

그에 대비해 많은 전략을 강구하는 동시에 대부분의 전쟁 대비를 삼남(충청,전라,경상)에 집중시켰고,

그 중에서도 특히 경상도 지역에 공을 들였습니다. 특히 대마도에서 주로 출몰하던 왜구들의 주 경로인

경상우도와 전라도 쪽만 수비를 강화하는 것이 아닌, 경상좌도에도 방비를 크게 강화하였으며, 심지어

유생들마저 동원하여 축성을 실시하고 성곽을 보수하는 등 노력을 기울여, 지방 양반들은 이에 반발하여

조정에 항의하는 등, 조선이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고, 붕당으로 서인/동인이 갈라져 통신사로 갔던 둘의

의견이 달라, 조정이 이를 간과하다 순식간에 밀렸다는 것은 허구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이전에는 그렇게 서술되었던데다가 수능 위주 입시교육에서 이를 다루지 않기에 모르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선이 전쟁 초기 그렇게 밀렸던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군의

규모를 잘못 파악했다는 것으로, 왜군의 규모를 만명에서 많아야 수만명 정도로 예상했으며, 이는

당대 예상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정도롤 일본의 대규모 침입이 있었던 때는 여말선초의

왜구 침입, 가장 가깝게는 을묘왜란이었기 때문에 이를 참고해 전략을 세운 조선의 입장에서, 일본이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할 것이라곤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 큰 실책이었습니다. 게다가 준비는 했지만

오랜 국정의 혼란과 국정의 문란으로 정군의 규모는 실제에 비해 적었고, 훈련도 모자랐던 조선군과

달리, 일본군은 전국시대의 혼란기에 수없는 전쟁을 통해 단련된 병력이 건너왔고, 결과는 예상하듯

초기의 연이은 대패로 이어졌습니다.


2. 조선의 패배는 일본의 총력전 때문이다?


이것도 사실과는 다릅니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이 대패한 것에는 일본은 총력전으로 왔으나

조선은 그렇지 않았다라는 말이 많은데, 일본은 20만 안팏의 군대를 동원했지만 대부분 히데요시

본인에게 종속적인 다이묘의 군대를 동원했고, 대부분 서일본의 다이묘들이 투입되었으며, 전국시대

명성을 떨치던 지휘관들은 대부분 본토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는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긴 했으나

여전히 적대적인 세력이 남아있고, 히데요시에 위압을 느껴 겉으로만 복종한 다이묘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으로, 대표적인 것이 간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죠.


실제로 히데요시는 전쟁이 진행되는 도중 본인이 직접 건너가 군을 지휘하는 것을 원하기도 했고,

자신의 심복이자 2인자인 마에다 토시이에를 파견하려고도 했으나, 도쿠가와가 어찌 나올지 몰라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도쿠가와를 조선으로 파견시키는 것 역시 고려했으나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도쿠가와는 임진왜란 당시 군량과 물자를 지원하는 것만 했을 뿐, 병력은 간토의 치안 유지라는

명목 하에 파병하지 않았으며(이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과의 통상관계를 비교적 쉽게 회복함),

그 외 동일본의 다이묘들은 상당수가 동원되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데요시 본인이 동원가능한 병력이 당시 일본 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30만 가량이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을 파병한 것으로 보아 히데요시 본인으로선 최소한의 수비병력만을 남긴채 임란에 전력을

다한 것은 사실입니다. 히데요시는 조선 정복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하고 적대적인 다이묘들을

찍어누를 수 있는 이득을 보고자, 조선 정벌에 엄청난 공을 들였습니다.


3. 신립의 배수진, 탄금대 전투의 대패.


일본군이 부산진에 상륙한 이후, 그들은 파죽지세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조선은 그때까지도

상황파악이 덜 되어있는 상태였으나, 당시 최고의 명장 중 한명이라 평가받던 이일을 보내 이를

막으려 했으나 이일은 상주에서 일본군의 가토에게 패했고, 그제서야 심각성을 인지한 조선 조정은

북방에서 명성을 떨치던,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 불리는 신립을 파견했으나, 신립은 험준한 조령,죽령을

피하고 탄금대 전투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웠고 일본군의 조총에 대패하여 자결하였다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인식이지요.


신립은 북방에서 여진을 상대로 공적을 쌓아올린 장군으로, 그의 정예병 주축은 북방에서 활약하던

기마궁수, 궁기병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중기병이 없기 때문에 충격력이 빈약했고, 신립이 지원받은

군사들의 상태는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나빴다고 합니다. 이에 배수진을 쳐서 병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설이 있고, 또 다른 설로는 기병을 운용하기에 편한

탄금대를 전장으로 삼았다는 설도 있는데, 제 생각으로는 아마 후자 쪽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립 입장에서도 자신이 가장 자신있는 기병을 통한 기동전을 선호했을 것이고, 본인이 이겨왔던

그 방법을 통해 일본군 역시 무찌를 수 있을 것이라 보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알려진 것처럼 조총이 아닌 전장 상황이 문제였습니다.

일본군은 모두 조총으로 무장한 것이 아니라 보급률이 20% 정도에 불과했고, 알려진 것처럼

조선군은 조총 사격에 배수진이라 피하지 못해 참패한 것이 아니며, 백병전으로 대패한 것도 아닙니다.

탄금대 전투 당일에는 큰 비가 내렸고, 다들 아시다시피 비가 오면 땅이 질척거려 기병을 운용하기

매우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기병대 돌격이 최악의 지면상태와 일본군의 대응으로 인해 차단되자

조선군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이를 포착한 일본군의 조직적인 대응에 조선군은 지리멸렬하게 패주,

이 때문에 한성과 충주 사이에 있는 병력은 사라졌고 일본군은 엄청나게 빠르게 진격하게 됩니다.


신립은 이 패배로 인해 무능한 장수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지만, 사정을 보면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어떠한 명장이라도 자신의 장기가 막히면 전쟁을 이기기에는 어려우니까요. 본인은 최선을 다했지만

져서는 안되는 싸움에서 진 지휘관인 만큼 평가도 가혹한 것 같습니다.


4. 수군, 수군, 수군!


처참하게 박살나던 육군과는 달리 수군은 상황이 좀 나아서, 임란 발발 당시 답이 없던 육군 편제에

비해 수군은 그나마 5만 4천명이라는 정원의 절반이 넘는 3만명의 병력과 충분한 규모의 전선을

갖추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었던 건 역시 일본과 제일 가까운 경상도에 위치한

경상우수영&경상좌수영으로 180척을 보유하고 있었고, 전라좌수영&우수영은 70척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 발발 직후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을 맡던 박홍과 원균(!!!)의 졸렬한 대처로

수군 전력의 2/3을 날려먹었고, 특히 가장 규모가 크고 정예였던 경상우수영의 수군을 거느렸던

원균은 수군해체(:::)라는 막장짓을 시전하며 신이 조선에 이순신 장군을 내린 것에 대한 밸런스

패치를 거하게 실행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웅 갓순신께서는 본인이 길러낸 정예병과 우수한 장교들과 함께 일본 수군을

쳐부쉈고, 그 쳐부순 상대들은 일개 무명이나 허접들이 아닌 일본 내에서도 수군 지휘에 유능하다

평가받는 장군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압도적인 교환비로 일본 수군을 계속 박살내

일본군의 기본 대전략이던 수륙병진을 좌절시켰고, 일본군은 보급난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이 특히 빛나는 것은, 다름아닌 박홍과 원균이라는 무능한 지휘관들이 조선

수군의 핵심이던 경상도 수군을 말아먹었기 때문이며,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눈부신 성과를 낸

이순신 장군은 더더욱 추앙해야 마땅합니다. 원균 명장설은 이걸로 기각할 수 있는 희대의 x소리고요.



5. 전라도는 왜 무사했는가?


일본의 기본 전략은 선조를 잡자였고, 그때문에 뒤에 있는 병력을 무시하고 앞으로만 내달리다 보니

점령지에서도 소요가 잦은데다 그 잡을 대상인 선조가 도망가면서, 일본군의 전략은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보급선이 엄청나게 길어졌기에 보급이 필요한데, 보급의 핵심이던 수군이 이순신 장군에게

족족 완파당하면서 수륙병진이 좌절되었고,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저항하며 전력이 분산되었으며,

명군이 구원하러 올 것이라는 소식이 들리자 일본군 역시 이에 바짝 긴장하여, 그동안 돌아보지 않던

조선 최고의 곡창지대, 전라도를 노렸으나, 전라도를 노렸던 가장 큰 시도 둘이 좌절되며, 전라도는

전쟁 초기 무사하게 됩니다. 하나는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는 김시민 장군의 진주성 전투이며,

또 하나는 권율의 이치 전투로, 이치 전투의 승리로 인해 일본의 전라도 침공은 막히게 됩니다.

이치에서 승전을 이끌어낸 권율은 먼후에 조선의 도원수로 군을 총괄하게 됩니다. 권율의 공적에

행주대첩이 워낙 유명하여 잊혀졌지만, 저는 이치전투가 권율이 세운 가장 큰 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2편은 명의 참전과 전쟁 진행과정에 있었던 일을 적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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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Updated at 2017-02-22 01:24:35

MBC드라마 옥중화를 보니 알겠더라구요 전지전능 옥녀가 죽어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거라 유추해봅니다

임란은 일본이 파죽지세로 평양성까지 올라가고 조선이 정비할 시간이 주어지면서 일본의 한반도전체의 정복은 1차적으로 차단되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빨빠진 명이라지만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겠죠

말씀처럼 일본은 선조를 잡는걸 목적으로 최대한 빨리 북진하는걸 목표로 하다보니 뒷정리를 잘 못한면도 있죠 그러니 저항군의 항전이 많았고 후방이 귀찮았을겁니다

전쟁준비에 대해서 소홀한건 맞다고 봅니다 이후 두차례 호란을 봐도 후회는 하고 반성을 하지 않은게 확 티가 났으니까요 선조는 해군을 없애려 시도까지 한 왕입니다 그리고 일본병력을 기만했던 거죠 왕도 문제였지만 주변의 위정자들이 당리당략에 따라 정치를 했고 선조도 본인이 후궁출신이란 자격지심도 있었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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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2 00:00:59

좋은 글 감사합니다!


3번과 관련해서 이형석씨의 임진전란사에서는 신립이 충주성에서 농성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라고 주장하셨는데 저도 이 의견이 타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시간 지연이 가능했고, 농성이므로 병력 탈주를 막기에도 쉬웠을 듯 싶고요. 조령에서 방어하는 것은 실제로 시간상 무리였다고 하고요. 그만큼 고니시의 행군 속도가 빠르기도 했죠. 어쨌든 역사에 만약이란 없으니..... 아쉽네요.
2017-02-22 00:15:03

역사저널 그날 이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임진왜란을 많이 다루었죠.

조총이라는 것에 위축된 조선 병력도 한몫했죠.
실제로 조총에 맞기가 쉬운일이 아니었고, 조총의 장전시간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고,
오히려 활이 더 나았음에도 졌죠. 그리고 일본이 쓰는 칼이 길이가 사람만한 길이를 썼죠.
평화의 시대를 조선이 보내는 동안, 일본은 그때 무술이 꽃을 핀 시기니까요.
질 수밖에 없었죠 초기에 당연히.
2017-02-22 00:16:54

오판 오판 오판들이 겹쳐져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심지어 선조 또한, 방계승계라는 컴플렉스때문에 왕위와 안정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방비에는 
어느정도 소홀한 것도 사실이지요. 또한, 전쟁 발발의 원인은 정명가도니 뭐니 하며 우방이되어 전쟁하자고 전하는 것을 대마도주에게 시키고 대마도쪽은 조선에 사실대로 안고하고, 조선에 답변도 히데요시에게 거짓으로 이야기하니 전쟁발발은 별 수 없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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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7-02-22 00:45:45

저는 일본이 패전한 가장 큰 이유가 물론 이순신 장군의 눈부신 수군활약도 있겠으나, 전쟁 전체를 거시적으로 놓고 봤을 때... 전투 하나하나가 갖는 의미를 넘어 더 큰 대전략, 즉 전쟁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실행하였는가를 놓고 보면 일본은 그동안 역사적으로 총력전(Total War)의 전쟁을 해본적이 없다는 데 그 이유를 들고 싶습니다. 총력전, 즉 온 국민이 가세한 군인과 민간의 경계가 없는 청야전술과 게릴라전이 가미된 외국 국가와 다른 민족간에 목숨을 건 총력전이 역사상 일본은 거의 처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일본 열도 안에서 그동안 치루어진 전쟁들을 보면 다 내전, 즉 다이묘들간의 전쟁으로 전투에서 승리한 다이묘에게 그 지역 주민들이 항복하고 새 주인으로 복종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습니다. 전쟁이란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의 그들만의 리그였던 것이죠. 일본 군부 다이묘들에게 그래서 전쟁이란 일종의 듀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은 조선의 침략도 조선의 대표 장군들을 격파한 이후에 조선왕만 사로잡아 항복을 받으면 조선의 GG를 받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도망을 쳤고, 이는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써 만일 일본의 다이묘나 쇼군이 전쟁중 도망을 치면 그것은 바로 권리를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 되었고 게임은 바로 끝나게 되겠죠. 그러나 조선 왕은 도망을 쳤어도 백성들은 분개할지언정 여전히 선조를 왕으로 인정하고 있었고 나라는 계속 유지 되었습니다. 왜 전쟁이 안 끝나는지 일본은 계속 이해가 안 되었죠. 이 때부터 일본군은 방황하기 시작하는데, 딱히 뭘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계속 선조와 왕자들만 쫓았습니다. 사실 이 때 했어야 했던 것은 장기전을 대비해서 전초기지를 세우고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보급로를 닦아야 했었죠. 그들은 이후에 열릴 헬게이트를 전혀 역사적으로 경험을 못 해봤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과거 고구려 시대부터 고려의 몽골 항쟁까지 거쳐본 맷집을 가진 민족으로 일본이 끝났다고 생각한 시점이 우리에게 전쟁이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던 것이었죠. 늘상 한반도에서 있었던 전쟁은 기본 정규군 다 털리고 떡실신부터 시작하는 전쟁이었으니까요... 깊이 적을 내륙까지 끌어들인 후 그 다음에 미궁속에서 쥐어 패서 이겼던 것이 한반도 전쟁 방식이었습니다. 

일본은 이러한 전쟁방식을 이후 20세기 2차대전 때까지도 잘 이해를 못합니다. 여전히 중국에서는 임란 때 하였던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고, 미국을 상대로는 무의미한 반자이 돌격과 카미카제를 반복하고 있었죠... 어쩌면 사무라이식 무사도라는 것이 제 개인적으로는 전쟁에는 적합하지 않는 정신이라는 생각도 가끔 듭니다. 오히려 몽골군이나 나폴레옹, 그리고 마오져둥이 추구하였던 실리주의적인 방식이 훨씬 낫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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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7-02-22 01:16:20

사실 조선도 선조대에 이르러서는 총력전 경험이 없는건 매한가지였죠. 총력전 경험없는 두 나라의 멘붕의 시기가 서로 달랐는데 초반에 멘붕한 조선은 점점 가다듬어지고 되려 초반에 잘하던 일본이 후반에 멘붕하며 말린 전쟁이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선조 잡으면 땡은 당시 어느 지휘관 어느 나라였어도 동일한 방법을 취했을 겁니다. 당시로 보면 굉장히 합리적으로 당연한 전략이니까요.
다만 선조가 저지른 병크인 일찌감치 수도버리고 ㅌㅌ가 수군대활약 및 그에 이은 육전에서의 몇 개의 큰 승리에다 백성들의 저항과 명군참전까지 겹치면서 본의아니게 성공적인 술래잡기가 되버렸고 그 때부터 일본군이 뭘 해야할지 멘붕오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겁니다.

보급도 제대로 안되고 지휘관들끼리는 삐걱대고 갑자기 명군은 내려오는데 밑에선 수군 때문에 무섭고 몇몇 중요 육군 진출로에서도 지고 여기저기서 백성들은 게릴라전까지 해대니 말씀처럼 총력전경험 없는 일본군으로써는 미칠노릇이긴 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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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7-02-22 07:36:11

임진왜란 최고 승리 요인은 명나라죠. 명나라 아니었으면 진짜 이순신이 아무리 해전에서 왜군들 박살냈어도 절대 못 이길 전쟁입니다. 조선 국왕이랑 관료들 병크짓 하고 있고 육지 장군들 마저 오합지졸과 다름 없을 때 전쟁 역전 시킨 건 명나라 군대와 의병들이죠.
결정적인 게 수십년간 정사를 돌보지 않고 신하들도 얼굴을 까먹을 정도였던 만력제가 조선파병문제에 관해서는 즉결 사인 해주고 사금고까지 털어서 조선 도왔죠. 특히 하성군(선조)이 당장 압록강을 건너 폐하의 신하가 되겠다고 하자 니네 백성들은 어쩌고? 하면서 말렸고 하성군에게 용돈을 주면서 조선 백성들 겨울은 나야한다며 직접 산둥반도쌀 100만석을 사서 보냅니다. 거기다 군사들이 조선가서 약탈할까봐 역시 사금고에서 은자를 털어서 병사들에게 용돈을 보내주는데 당시까지도 물물교환경제였고 화폐개념이 없던 조선 사회에서 은자를 받아주지를 않아서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러자 급하게 또 쌀을 사서 군량미를 보내는데 요동반도 근처까지 배달해 줄테니 니네가 받아가라고 하는데 당시 무역을 하지 않고 수레가 다니는 길조차 없었던 조선은 그걸 실어갈 수단이 없었죠. 어쩔 수 없이 곡식 실어갈 배를 수배하고 만들어서 보냅니다. 뭐 당시 조선상황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데 진짜 명나라 3대 암군 중 하나인 만력제를 조선에서는 그의 사당인 만동묘도 만들어서 제사까지 지내줬는데 진짜 거의 은인 수준이죠.
오죽하면 중국에서도 고려천자라고 했을 정도니...
이외에도 조선은 노답인게 원래 명나라 군량, 보급을 조선에서 책임지기로 하고서 파병했는데 군량은 보급이 안돼서 어쩔 수 없이 명나라가 책임지고, 말먹일 풀이라도 니내가 구해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그래도 없다시피한 상업수준이 전쟁통에 아예 박살이 나서 구할 길이 없었죠. 그래서 명나라 최정예 기병부대인 요동기병 말들 절반을 굶겨죽입니다.
요동 철령위였던 이여송은 여기에 빡쳐서 돌아가겠다고 하는데 유성룡이 빌다시피해서 남기죠.
임진왜란 공으로 따지면 이순신, 명, 의병이 4:4:2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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