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과 오후, 세월호와 융통성
25
2697
2017-01-20 16:43:28
머리 속에 생각나는대로 제목을 적어봤는데 뭔가 이상하네요.
오전과 오후에 있었던 같은 일, 다른 기분입니다. ;)
매표소에서 열심히 발권을 하고 있었어요.
순번대기표를 눌러가며 125번 고객님, 129번 고객님, 133번 고객님.
한명, 두명, 세명.
140번 고객님을 외치고 나서야 제가 발권하는 고객 자리 바로 옆에서.
할머님 한분이 기다리고 계신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어요.
<아, 순번대기표가 어딨는지 모르시는구나>
"어르신 저 뒤쪽에 보시면 순번대기표가 있습니다. 그거 뽑고 기다려주시겠어요?"
근데 이 말을 하면서도 뭔가 찜찜했어요.
못해도 5분 정도는 거기서 기다리고 계셨거든요.
순간적으로 먼저 발권을 도와드려야하나 라는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입에서는 자동적으로 나도 모르게 다음 번호를 불러버렸고 140번 고객은 내게 오고 있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왜 안 좋은 예감은 거의 정확하게 매번 들어맞을까요.
아주 고운 어르신이었는데 조곤조곤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내가 여기있는거 쭈욱 보지 않았느냐.
그럼 보통은 오래 기다린 거 아니까 순번대기표를 알려주는 것보단 먼저 좀 해주면 어떠냐."
보통 때였으면 원리원칙을 지킨다며 순번대기표대로 했어야 하는 일이.
이날 오전엔 좀 뭔가 죄송하더라구요.
"죄송합니다. 어르신.
기분 좋게 영화 보러 오셨는데 저때문에 기분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먼저 도와드렸어도 좋았을텐데 다른 분들이 기다리고 계셔서 선뜻 먼저 해드리기가 좀 그랬네요.
이쪽에서 바로 발권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상하게, 죄송했어요.
뭐랄까, 악의적으로 정말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내가 먼저야.
라는 마인드가 아니라 정말 잘 모르고 거기 서계신 것 같았거든요.
90도로 허리숙여 저렇게 말했는데도 어르신은
"아니 됐어, 당신같은 사람한테 안 해"
라고 하시며 옆자리 아르바이트생에게로 가셨습니다.
뭐.
하루이틀 겪는 일 아니니까요. ;)
사과를 안 받아주셔서 조금 찜찜했지만 그건 사과를 받는 사람의 입장이니까요.
그렇게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됐어요.
거짓말같이 오전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순번대기표대로 발권하고 있었는데 아주머니 한분이 순번대기표를 못 찾고 오래 기다리시더라구요.
그래, 이번엔 먼저 좀 해드리자.
"470번 고객님, 죄송한데 여기 아주머님이 좀 오래 기다리셔서 먼저 금방 해드리고 도와드려도 될까요?"
470번 고객님은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어요.
"그럴거면 순번대기표를 왜 만들어놨어?
이렇게 원칙대로 안 하는 당신같은 사람들 때문에 세월호가 그렇게 된 거 아냐!"
아-
진짜-
너무-
틀린 말이 아니라서-
진짜 순간적으로 얼굴이 너무 벌개졌어요.
아.
맞아.
내가 좀.
안일했구나....
결국엔 어르신께 싫은 소리는 좀 들었지만 번개같이 아주머니 발권을 해드리고.
470번 할아버님을 발권을 해드리고.
잠시 혼자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아무튼 좀 그렇네요 ;)
여긴 눈이 많이 내려요.
추울텐데 다들 감기 조심하셔요.
35
Comments
글쓰기 |
소박하게 예쁜 느낌이네요.
사람을 대하는 일은 항상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추운데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