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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과 오후, 세월호와 융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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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0 16:43:28

머리 속에 생각나는대로 제목을 적어봤는데 뭔가 이상하네요.



오전과 오후에 있었던 같은 일, 다른 기분입니다. ;)


매표소에서 열심히 발권을 하고 있었어요.
순번대기표를 눌러가며 125번 고객님, 129번 고객님, 133번 고객님.
한명, 두명, 세명.


140번 고객님을 외치고 나서야 제가 발권하는 고객 자리 바로 옆에서.
할머님 한분이 기다리고 계신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어요.


<아, 순번대기표가 어딨는지 모르시는구나>


"어르신 저 뒤쪽에 보시면 순번대기표가 있습니다. 그거 뽑고 기다려주시겠어요?"


근데 이 말을 하면서도 뭔가 찜찜했어요.
못해도 5분 정도는 거기서 기다리고 계셨거든요.
순간적으로 먼저 발권을 도와드려야하나 라는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입에서는 자동적으로 나도 모르게 다음 번호를 불러버렸고 140번 고객은 내게 오고 있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왜 안 좋은 예감은 거의 정확하게 매번 들어맞을까요.


아주 고운 어르신이었는데 조곤조곤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내가 여기있는거 쭈욱 보지 않았느냐.
그럼 보통은 오래 기다린 거 아니까 순번대기표를 알려주는 것보단 먼저 좀 해주면 어떠냐."


보통 때였으면 원리원칙을 지킨다며 순번대기표대로 했어야 하는 일이.
이날 오전엔 좀 뭔가 죄송하더라구요.


"죄송합니다. 어르신.
기분 좋게 영화 보러 오셨는데 저때문에 기분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먼저 도와드렸어도 좋았을텐데 다른 분들이 기다리고 계셔서 선뜻 먼저 해드리기가 좀 그랬네요.
이쪽에서 바로 발권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상하게, 죄송했어요.
뭐랄까, 악의적으로 정말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내가 먼저야.
라는 마인드가 아니라 정말 잘 모르고 거기 서계신 것 같았거든요.


90도로 허리숙여 저렇게 말했는데도 어르신은
"아니 됐어, 당신같은 사람한테 안 해"
라고 하시며 옆자리 아르바이트생에게로 가셨습니다.


뭐.
하루이틀 겪는 일 아니니까요. ;)
사과를 안 받아주셔서 조금 찜찜했지만 그건 사과를 받는 사람의 입장이니까요.


그렇게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됐어요.


거짓말같이 오전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순번대기표대로 발권하고 있었는데 아주머니 한분이 순번대기표를 못 찾고 오래 기다리시더라구요.
그래, 이번엔 먼저 좀 해드리자.


"470번 고객님, 죄송한데 여기 아주머님이 좀 오래 기다리셔서 먼저 금방 해드리고 도와드려도 될까요?"


470번 고객님은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어요.


"그럴거면 순번대기표를 왜 만들어놨어?
이렇게 원칙대로 안 하는 당신같은 사람들 때문에 세월호가 그렇게 된 거 아냐!"


아-
진짜-
너무-
틀린 말이 아니라서-


진짜 순간적으로 얼굴이 너무 벌개졌어요.


아.
맞아.
내가 좀.
안일했구나....


결국엔 어르신께 싫은 소리는 좀 들었지만 번개같이 아주머니 발권을 해드리고.
470번 할아버님을 발권을 해드리고.
잠시 혼자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아무튼 좀 그렇네요 ;)


여긴 눈이 많이 내려요.


추울텐데 다들 감기 조심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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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3
2017-01-20 16:45:07

소박하게 예쁜 느낌이네요.

사람을 대하는 일은 항상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추운데 건강하세요!

WR
2017-01-20 18:48:00

아이고, 별 말씀을요 ;)


눈이 소복소복 쌓여서 소박소박해지고 싶었나봅니다.
1
2017-01-20 16:49:23

말을 너무 쉽게해요.
상대방에게 목소리를 높혀 스스로를 보호하는 수준 역시 싸구려구요.

매너, 존중에 대해 다시 배웠으면 좋겠어요.매년 면허 갱신처럼 자격증을 도입해야되나...

WR
2017-01-20 18:48:29

하지만 뭐.

무슨 넋두리를 하고 싶었다기보단.
그냥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


댓글 감사해요, 미놀님.
2017-01-20 16:53:29

각자 입장이 다르고 생각의 시작이 다르니... 사람 대하는게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WR
2017-01-20 18:48:48

맞아요, 사람 대하는 게 정말 어려워요.

근데 그 와중에도 재밌다고 생각하면 좀 변태같나요? ;)
8
2017-01-20 17:15:38

와 진짜 애매하네요.....

르브론이랑 웨이드의 2대1속공을 막아야하는 가드가 이런느낌이었을까요.

WR
2017-01-20 18:49:23

푸하하하하하 비유 정말.

매니아에서만 볼 수 있는 비유겠죠? ;)


댓글 감사합니다 아무로레이님!
2017-01-20 18:32:23

미소지기 경험자라서 10000% 공감합니다

WR
2017-01-20 18:49:35

크으-

지켜주지 못 해 미안해요, 미소지기님!
6
2017-01-20 18:33:59

저는 이런것으로 고민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의 문제점은 각 개인이 정해진 원칙보다 더 합리적인 판단을 할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은 때로는 융통성이나 유도리, 때로는 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며 법치사회의 근간을 흔들고 있습니다.

물론 원칙이라는 것은 경직되어 있기에, 매 케이스마다 늘 최선의 결과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순간적인 임기응변이 원칙을 따르는 것보다 더 바람직할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예를 들면,

이 사람을 먼저 해줘도 되나 마나 하는 판단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내가 이 정도면 먼저 서비스를 받아도 된다는 그 기준도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글쓰신분과 오전의 할머니는 아주 점잖은 분들이지만,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원칙을 벗어나는 것이 용인되어 버리면, 그 다음은 언제 어느정도 선을 넘어도 되느냐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들이 충돌하여 갈등이 일어나고 부정이 생겨납니다. 원칙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일을 막기위해 존재하는 것 아닐까요.

저는 140번 고객님에 대한 글쓰신분의 대응이 타당했다고 생각하며, 470번 고객님의 항의 또한 매우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WR
2017-01-20 18:51:35

맞아요, 뉴욕님.

이전 글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꽤나 원칙주의자입니다.
비슷한 생각이거든요.

"선례가 생기면 모든 일에 그와 같은 적용을 해야한다. 선례를 만들어선 안된다."

근데 일을 하다보니 그게 잘 안되더라구요.
넋두리의 요지는....
사실 470번 할아버님께서 그냥 적당히 욕해주셨으면 '아이고, 죄송해요, 어르신' 요정도로 마무리됐을 거에요.
근데 세월호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참 감정 복잡 미묘해졌어요.
뉴욕님 댓글에 따라서도....
저의 이런 태도가 결국은 배를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거든요 ;)


아주 심한 원칙주의자가 간만에 한번 그거 좀 깨뜨려봤는데 요런 모양이 됐네요.


댓글 감사합니다!
2017-01-20 19:08:38

같은 생각입니다. 오전대로 하는게 옳았다고 봐요. 오후같은 상황에서도 규칙대로했으면 감정섞인 소리를 들었을지라도 자신을 방어할수 있는 논리가 생기는것이니깐요. 말씀하신것처럼 융통성이라는 명목하에 이뤄지고 있는 수많은 편법과 불법들.. 한국 사회를 망치는 주범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내앞에다꿇어 님께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2017-01-20 19:33:23

동의하고 추천합니다. 융통성, 유도리 이런 단어 너무 싫어합니다.

2017-01-20 18:36:10
고생하셨습니다
WR
2017-01-20 18:51:51

고생은요, 뭘 ;)



댓글 감사해요, 달바라기님!
1
2017-01-20 18:53:18

사람상대하는 일이란.. 고생하셧습니다.

근데 저는 오후의 아저씨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큰일이 아니니 융통성을 발휘하시려던 생각도 나쁜건 아니고 꿇어님이 잘못한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영화관에 보면 안내창구위엔 번호표시하는 전광판이 언제나 번호순으로 일이 처리된다고 보여주고 있고 조금만 지켜보면 다들 번호에 맞춰 본인순서를 기다리는것도 알 수 있죠. 
과연 순번대기표를 정말 못찾아서 줄을선걸까요? 순번대기표를 뽑으면 기다리는것보다 더 오래걸릴것 같으니 안뽑은걸까요? 저는 너무 비관적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부분들에서 원칙을 벗어난 행위들이 받아들여질수 있기에 다른 장소에서도 같은 행위를 부르고 사고 또한 발생할수있다는 부분에서 오후아저씨의 말이 와닿네요. 
WR
2017-01-20 23:21:19

맞아요.

하지만 저는 거의 모든 일에, 특히나 고객 상대할 때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입니다만....
혹여나 그러지 않는 친구들이 있다고 해서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것도 나름의 정답이죠 ;)
오늘은 저도 하나 배운 날이었습니다.
2017-01-20 19:17:53

사람마다 달라서... 원리원칙대로 하되,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어르신이나 많이 기다리시는 분들은 좀 배려해주는 식으로 섞어서 조율하는 수밖에요. 즉 글쓴 분께서 잘하고 계신데, 말했다시피 이게 꼬일 수도 있거든요. 그냥 일이 안 되려다보니 이렇게 된 거라고 여길 수밖에 없죠. 글쓴 분께서 많이 겪으시는 일이다보니 여유롭게 넘기는 것 같아서 그 마인드가 대단한 것 같습니다. 

WR
2017-01-20 23:21:45

맞아요.

사실 그냥 저냥 넘어갈 수 있는 날이었는데.
우연찮게 이렇게 모든 것이 모이다보니 그렇네요 ;)
2017-01-20 19:39:48

어렵지만 남의 의견에 휘둘리기 보다는 내원칙을 지키는게 서비스업에서는 중요하다고 봅니다. 

어짜피 100% 만족시킬수는 없지만 자기원칙을 못지키면 흔들리기 마련이거든요. 
순간순간 맞는판단만 할수는 없으니 나머지는 잘 삭이는수 밖에 없어요. 

WR
2017-01-20 23:22:10

제 원칙은 일단은 원칙이다.

그리고 사실 그러면 안될 수도 있는거지만 상대 봐가면서 융통성 발휘하자!
입니다. 하하하하하
Updated at 2017-01-20 20:05:00

근데 저는 그냥 뭐라 하신 두분만..
서비스직종이 힘든 건 누구나 알고
불친절한 자세로 대한 것도 아닌데
참 별로라고 생각되네요.
옳고 그름을 떠나 다들 이해해주시면
서로 얼굴 붉힐 일 없는 것을.
세월호 이야기도 좀 너무 나갔고..
손해 보는 걸 못 참는 거..

WR
2017-01-20 23:22:47

기본적으로 저는 불친절하진 않아요.

그건 정말 자부합니다. ;)

근데 그분들 심정도 십분 이해가 돼서.
오늘은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고 해서요.
2017-01-20 20:40:02

고생하셨습니다. 저도 기숙사 사감하면서 난처한 일이 참 많았습니다. 악법이면 진즉에 윗대가리한테 바꾸는 것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 원리원칙대로 하는게 멀리볼 때도, 자신한테도 좋더라고요.

WR
2017-01-20 23:23:08

맞아요.

악법이면 윗 사람을 바꿔야되는데 그것도 참 내 맘같지 않아서요 ;)
2017-01-20 22:32:18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정이 있기 때문에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도 어느 정도 상황을 보면서 조율을 해야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어르신들의 반응이 심했다는 것도 동의하구요. 하지만 원리 원칙은 확실히 따지고 넘어가야한다고 합니다. 자꾸 융통성, 유도리, 편법, 꼼수 뭐 이런식으로 살아가는게 현명하다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박히고 지켜봤자 나만 손해다라는 생각이 생기니까 악순환이라고 봅니다. 안타깝지만 개인이 손해를 보더라도 다음을 위해서, 또 규칙을 지킨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확실하게 넘어가는게 옳다고 생각해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도 바쁘고, 시간이 많아서 번호표 뽑고 기다리는거 아니니까요. 대신 영화관, 은행 등에서도 책임의식을 갖고 조금 더 확실하게 안내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죠.


WR
2017-01-20 23:24:05

하인릭님 말씀이 맞아요.

원리원칙이 지켜지면 사실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없는 건데 말이죠.
나 하나는 괜찮겠지 때문에 이런 일들이 발생해요.
그래서 요즘은 대기하는 고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이벤트를 기획 중이에요 ;)
영화관을 단순히 영화만 보러 오는 곳이 아니게 만드려구요.
1
2017-01-20 23:27:49

그나저나 내앞에다꿇어 님처럼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주고 배려해주시는 분이 계신다니 참 기분이 좋습니다. 사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도 당연히 존중되어야 하고 좋은 가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식당에서 알바 2년 하고 사람이 많이 바뀌게 되더라구요.. 특히 서비스업하는 분들에게는 늘 잘하려고 노력하는데 와이프는 무슨 딴사람 보는 것 같다며 

2017-01-21 00:00:53

감사합니다

WR
2017-01-23 01:08:27

별말씀을요 ;)

2017-01-21 01:51:40

화이팅입니다. 고생하십니다. 원리원칙을 정말로 중시하는 나라에서 지내다 보니, 초반에는 특히 그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모두가 당연히 그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예외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게 정말 중요한 일이란 걸 깨닫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뭔가가 끼어들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 (적절한 단어일지 모르겠습니다만)이 꽤나 좋은 것이더라고요.

칼 같이 자르는 것에 대한 관용과 원칙을 지킴으로 불편해지는 걸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가능할텐데 우리는 언제쯤 이럴 수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자기맘대로 안 되면 소리부터 지르는 진상들을 보면 참 갑갑해지기도 합니다.

WR
2017-01-23 01:09:33

맞아요 안도감. 그래, 내가 못 한 건 아니야 ;) 그런 생각이죠 뭐.

원칙주의자인데 그래도 가끔은 융통성을 발휘하긴 합니다. 분위기 상황봐서요 ;)

2017-01-21 03:18:01

분명 글쓴이님의 배려심과 서비스심에 기분좋게 영화를 관람하시는 분들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또한 간혹 나오는 이런 클레임은 사실 그냥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짬도 되어 보이구요.!

직접 face to face로 사람과 맞되어 서비스하진 않았지만, 게임의 운영자를 해본 입장으로써,

모든 사람의 입맛을 맞추기란 참 힘들다라는 것을 잘 알고있습니다.

그리고 원칙을 지키자 라고 하는것도 잠시금 흔들릴 때가 오기도 하고요.

사람이라는게 그래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 원칙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분명 그 틀에서 벗어나질 않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좋은 사람이 주변에 가득해 모든 날이 좋길 바래봅니다.


WR
2017-01-23 01:09:56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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