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이 지나도 극과 극으로 평가가 갈리는 요절한 천재
연말인 12월 22일에 화제를 몰고 왔던 영화가 개봉됩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화가 에곤 쉴레가 28살의 나이로 사망한지 거의 100년이 지났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그때나 지금이나 극과 극으로 갈립니다. 이 영화는 에곤 쉴레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준 네 명의 여성에 대한 것입니다. 그중에 세 명이 누구인지는 쉽게 짐작이 가지만 한때 에곤에게 관심을 가졌던 저도 4번째 여성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네요. 저 영화가 개봉되면 극장에서 봐야할지 말아야할지 벌써부터 고민이 됩니다.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1918)는 1890년 6월 12일 오스트리아 다뉴브 강변의 소도시 튤른(Tulln)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에곤 쉴레의 아버지는 튤른 철도역의 역장이었고 매독으로 추정되는 성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에곤 쉴레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으나 부모는 그의 예술적 재능을 억누르려 했습니다. 에곤의 아버지는 성병으로 인해 자주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고, 아들이 공부를 소홀히 하며 그림에 열중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해 했습니다. 하지만 에곤은 그런 아버지를 우상처럼 숭배했고 자신이 15살에 아버지가 성병으로 사망했을 때 어머니가 슬퍼하지 않은 모습에 상처받아 어머니에 대한 미움을 사망 때까지 품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망 후 가족들의 반대가 수그러들자 에곤은 16살인 1906년 시험을 치러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합격했습니다. 쉴레보다 한 살 많은 화가지망생 아돌프 히틀러가 두 번 입학을 시도했다 실패한 바로 그 학교입니다. 쉴레는 미술아카데미에서 창조적인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그럴수록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수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에곤은 미술 아카데미 2년차이던 1907년, 당대 최고의 화가인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나 그에게 인정받았습니다. 클림트는 에곤의 그림이 자신의 젊은 시절 작품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감탄하며 그를 비엔나 미술계의 중심으로 끌어 주었습니다. 클림트의 도움으로 에곤 쉴레는 1908년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였고 자신의 그림을 정기적으로 구입해주는 후원자를 얻었습니다.
결국 에곤은 미술 아카데미의 강압적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1909년에 자퇴했습니다. 에곤 쉴렌는 1909년까지 클림트의 영향이 현저히 드러나는 작품을 그렸으나 미술학교 자퇴 후 스무 살인 1910년부터 사회적으로 은둔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그림세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쉴레는 클림트와 마찬가지로 성적인 욕정을 그림의 주요 소재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클림트가 자신의 성적인 본능과 욕구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고 두리 뭉실한 상징적 표현으로 치장한 반면, 쉴레는 절제 없이 적나라하게 인간 이면의 욕정까지 표현했습니다. 클림트가 장식적 요소로 채우던 인물 주변의 공간을 에곤 쉴레는 주로 빈 공간으로 두고 내면을 중요시했습니다. 클림트의 영향을 받은 조화로운 색조는 점차 사라지고 강렬한 색상과 표현의 자화상 및 누드묘사가 등장하였습니다.
에곤 쉴레의 1910년을 대표하는 두 개의 작품을 여기에 소개합니다. 그가 평생 가장 많이 그린 그림은 자화상과 여성 누드입니다. 하지만 에곤의 작품 속에는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제대로 된 인간의 모습이 없습니다. 그의 자화상들은 살이 거의 없이 가죽만 남은 채 고통으로 일그러진 상처투성이 얼굴에 어느 방향을 향하는 지 알 수 없는 손에다가 자신의 성기까지 과감히 내놓고 있습니다. 그의 여성 누드들은 더욱 충격적이어서 모든 여성들이 창녀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여성의 성기를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당시에 금기였던 음탕한 행위를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게다가 자신의 네 살 아래 여동생인 게르티 쉴레(Gerti Schiele)를 모델로 해서 그런 그림을 여러 장 그렸습니다. 아래의 1910년 자화상은 고통을 참는 듯 한 일그러진 얼굴을 한 누드의 모습입니다. 육체는 해보학적인 근육들을 겹치는 선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살아있는 사람의 살색이라고 보기 어려운 어두운 선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텅 빈 배경은 고통스러워하는 주인공을 도와줄 사람들이 아무도 없음을 이야기하는 듯 허전함을 느끼게 하며 허공에서 뒤틀린 팔은 그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는 현재 상황을 말해줍니다. 특히 눈동자 없는 눈은 스스로의 삶을 고통스럽고 고립된 존재로 느꼈던 에곤의 감정을 표현하는 듯합니다.
바로 위의 1910년 여성 누드화는 당시 열여섯 살이던 자신의 누이동생 게르티를 모델로 한 작품으로 에곤의 전체 작품 중에서 여성이 가장 정상적으로 묘사된 것에 속합니다. 전형적인 에곤 쉴레의 누드화를 감상하고 싶으신 분은 구글에서 Egon Schiele nude로 검색하시기 바랍니다.
에곤 쉴레는 1910년부터 초상화가로 작품 활동을 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내면을 표현하는 듯한 날카로운 선과 얼굴의 상처와 일그러진 모습의 쉴레의 표현방식은 그 당시 유명 인사이던 의뢰인들에게 외면 받았고, 더 이상 초상화 의뢰가 들어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돈에 대한 씀씀이가 컸던 에곤 쉴레는 금방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졌지만 항상 말끔한 정장에 단정한 모습을 하고 다녔습니다. 쉴레는 자신의 초상화속 모습과 달리 늘 흰색 셔츠에 넥타이를 두른 정장 차림이었고, 배우를 연상시키는 미남이었습니다. 초상화 의뢰가 들어오지 않자 쉴레는 자연을 대상으로 한 여러 작품을 그렸습니다.
에곤은 1911년 클림트의 소개로 17살의 발리 노이칠(Wally Neuzil)을 만나 애인 겸 누드모델로 동거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풍경화와 함께 어린 소녀들의 누드화를 그렸는데, 그 때문에 1912년 4월에 미성년자를 유혹했다는 죄목으로 24일 동안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출옥 후 누드화가로 에곤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 그의 야한 누드화를 구입하려고 하는 구매자들이 충분히 많았습니다. 그 즈음 에곤의 작품에 매료되었던 부유한 철도 공무원의 딸 에디트 하름스(Edith Harms)가 에곤에게 접근했습니다. 에곤은 그에게 헌신적이던 노이칠을 버리고 부유한 에디트 하름스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정신병자에 색정광 화가라는 악명 때문에 하름스의 집안에서는 에곤과의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으나 1915년 6월 쉴레는 하름스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결혼 사흘 만에 1차 대전의 발발로 인해 병역에 소집되어 에곤은 프라하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군인 신분의 화가로 풍경화와 수채화를 그려 작품집을 출간했습니다. 1918년 비엔나 전시회는 에곤 쉴레에게 큰 성공을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해에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으로 임신 6개월이던 아내 하름스가 사망했고, 아내가 사망한지 3일 후에 같은 병으로 에곤 쉴레는 28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2018년은 에곤 쉴레가 사망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에곤 쉴레는 지금보다 훨씬 경직된 100년 전에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자신의 작업을 끝까지 밀고 나갈 뛰어난 재능과 신념을 갖춘 화가였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에곤은 요절한 천재화가로 인정받지만 여전히 그의 작품에 대한 호불호는 극과 극으로 갈립니다. 서양에서도 에곤 쉴레의 작품을 전시하는 곳에는 대부분 관객들에게 주의를 요구하는 경고 문구가 붙습니다.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을 모조리 까발리는 게 에곤 쉴레의 본성인 만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의 작품을 불편해 하는 사람이 줄어들 거 같지 않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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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챙겨봐야겠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