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의 당선과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
질타가 있으면 달게 받고 자숙하려고 사과의 글을 올렸는데, 질타 대신에 격려의 댓글이 더 많아서 놀랍기도 하고 송구하기도 합니다. 많은 댓글에 일일이 답을 못 드리고 이 글로 저의 심경을 대신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 제도입니다. 국민이 직접 선거를 통해 대선 후보자에게 투표하는 것은 맞지만 더 지지율이 더 높은 후보가 아니라 538명의 선거인단 중 과반수인 270명 이상을 확보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538명이라는 숫자는 연방 상원의원의 숫자(100명), 연방 하원의원 숫자(435명)에 워싱턴DC의 선거인단 숫자인 3명을 합친 수입니다. 연방 상원의원은 50개 주에 동일하게 2명씩 배정되고, 연방 하원의원은 각 주의 인구에 비례해서 배정됩니다. 인구가 가장 많은 캘리포니아 주는 53명의 연방 하원의원이 배정되는데, 여기에 연방 상원의원 숫자인 2명을 더한 55명이 캘리포니아 선거인단 숫자입니다. 캘리포니아 주 다음으로 선거인단 숫자가 많은 다섯 개의 주는 텍사스 주(38명), 뉴욕 주(29명), 플로리다 주(29명), 일리노이 주(20명), 펜실베이니아 주(20명)입니다. 반면에 현재 인구 기준으로 알래스카 주, 델라웨어 주, 몬태나 주, 노스다코타 주, 사우스다코타 주. 버몬트 주, 와이오밍 주 등은 각각 선거인단 숫자가 3명에 불과합니다.
선거인단 제도의 핵심은 각각의 주에서 국민에게 가장 많은 득표를 한 후보의 정당이 그 주의 선거인단을 독식하는 것입니다. (메인 주와 네브래스카 주는 예외입니다.) 올해 캘리포니아 주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1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힐러리 클린턴의 득표율과 상관없이 민주당은 캘리포니아에 배정된 55명의 선거인단을 독식합니다. (압도적인 표차로 이기든 가까스로 이기든 상관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공화당이 확보한 50개의 주와 워싱턴DC의 선거인단을 숫자를 모두 합쳤을 때 270명이 넘었기 때문에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당선된 것입니다. 미국이 한국 등 세계 대부분의 나라와 달리 직접선거제가 아니라 우여곡절 끝에 선거인단제를 택한 시기는 1787년 미국 헌법을 만든 제헌의회 때 부터였습니다. 그 이후로 선거인단 제도에 대한 찬반양론이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데, 각 주별 불공정한 선거인단 수 배분과 사표를 양산하는 승자독식 제도 그리고 경합주에 집중된 선거 양상이 논쟁의 핵심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주에서 특정 정당의 지지세가 워낙 뿌리 깊기 때문에 내가 다른 당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경우 그냥 사표가 되는 걸 나 스스로가 알기 때문에 선거참여에 대한 열의가 떨어집니다. 그리고 51-49로 이기나 99-1로 이기나 똑같은 결과가 발생하는 것은 민주주의 체계가 작동하는 일반적인 개념과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합주가 아닌 경우는 선거 기간 내내 양당 모두에게 찬밥 신세가 되기 쉽습니다.
선거인단 제도를 지지하는 논리도 만만치 않지만 다수의 미국인들은 마음속으로 선거인단 제도는 미국의 전통이기 때문에 지켜지는 것이지 1인1표제가 민주주의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날이 갈수록 높아집니다. 거기에다 민주당은 선거인단이 가장 많은 캘리포니아 주와 세 번째로 많은 뉴욕 주를 거의 먹고 들어가는 등 선거가 시작도 되기 전에 기본적으로 확보된 선거인단 수가 눈에 띄게 공화당보다 많은 상태에서 출발하는 불공정 게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미국이 낡아빠진 선거인단 제도를 포기하고 1인1표제를 택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를 보고 그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번 대선은 누가 봐도 경합주를 싹쓸이 한 도널드 트럼프의 완승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민주 공화 양당이 총력 선거전을 펼친 10여개 주에서 대부분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공화당은 선거인단 수 300명을 넘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투표자 지지율에서는 힐리러 클린턴이 앞서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해 지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처럼 직접 선거를 했다면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되는 것입니다. 물론 직접 선거를 했다면 경합주보다는 대도시에 시선이 집중되고 농촌 지역은 소외당하는 상황이 발생해서 지금과는 다른 선거양상으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여튼 힐러리 클린턴은 득표수에서는 이기고 선거인단 수에서는 완패한 것입니다. 선거인단 구도가 민주당에 유리해 득표수가 비슷하다면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 가능성이 높을 거라는 일반적인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선거에만 국한한다면 득표수가 아니라 선거인단 수로 당락을 결정하는 제도가 미국인들의 민심과 부합하다고 인정합니다.
저는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았고, 심하게 반대한 편이었습니다. 물론 저에게 투표권이 없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이번 선거가 득표율에 상관없이 도널드 트럼프의 완승이라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그것이 미국 유권자들의 선택이라는 것도 인정합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판단 아래 정당한 투표권을 행사한 것입니다. 물론 그 결과에 따른 대가도 미국인들이 받아들여야겠지요. 트럼프는 외교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에, 국제정세와 관련해서는 공화당의 의견을 많이 반영할 거라 생각합니다. 반면에 미국 내의 문제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자기에게 투표한 유권자의 뜻을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하려 하겠지요.
이번 주에 올리겠다고 약속한 버니 샌더스에 대한 이어지는 글은 지금 상황에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당분간 연기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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