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
자동
Free-Talk

현희씨, 그리고 기도하며 산다는 것

 
24
  1516
Updated at 2016-10-22 01:19:06
10월 21일에 방영된 SBS '세상에 이런 일이' 현희씨의 방송이 화제입니다. 여기 매니아에서도 글이 올라왔고,각종 SNS 채널들과 제 단체카톡방에서도 이야기들이 올라오더라고요. 댓글들도 하나같이 '인간에 대한 신뢰'를 상기하게 하는 선한 내용이어서 다행이었고, 벌써 3억 원이 넘게 모였다고 합니다.

저는 현희씨를 보며 '기도'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글재주는 없지만, 여기 제 단상을 옮겨 보려 합니다.

유전 질환인 신경섬유종이라는 병 때문에 정말이지 끔찍한 얼굴을 지닌 33세 여성 심현희 씨를 대하면서 드는 감정은, 일종의 숙연함 같은 것입니다. 눈과 코와 입을 찾아볼 수 없는, 몇 년간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거의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녀를 보면서, 우리는 한 사람이 지닌 비극적인 운명의 깊이와 너비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하늘과 바다를 처음 보고 놀라워 했던 그때처럼, 우리는 다시 유약하고 무력한 어린아이가 됩니다.

저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이처럼 내가, 그리고 인간이 알고 보면 정말이지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행위가 바로 '기도하는' 삶의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 자신은 물론 소중합니다. 내 주위의 부조리함으로 인해 지치고 아파하는 나 자신을 돌보는 일도 중요하죠. 그러나 나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 부대끼는 사회의 경계 너머에서, 경계 너머이지만 우리와 아주 가까운 어딘가에서, 비참한, 단 한 번뿐인 삶을 감내해야 하는 누군가의 존재는 우리의 시야를 비상하게 깨워 놓습니다. 

이 '시야의 확장'은 우리를 약간은 고요하고 허탈하게 만들어 줍니다. 겸허하게 만들고, 세계의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끔 합니다. 그것이 기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기도는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을 통해, 그들을 동정하며, 자신의 삶을 위로한다'는 식의 긍정론과는 아무 관계 없습니다.

이런 '기도'는 그저 '운명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게 합니다. 현희씨를 바라보는 일은, 내가 겪고 있는 힘든 상황을 극복하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겪고 있는 이 괴로운 상황의 '위치'를 심리적으로 재조정하게끔 만듭니다. 그 아픔이 인간의 보편적인 지반 위에 놓여 있다는 무의식적인 안도감을 줍니다. 이 안도감은 내가 더 잘 나가야 한다는 쪽으로 귀결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더 줄이고자 하는 선한 마음으로 귀결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도'는 '냉소는 가장 좋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이 기도는 양심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타인의 비탄을 바라보며 가슴을 졸이는 일은, "양심이란 결국 고통을 겪고 싶지 않은 나약한 자들의 변명"이라는 회의주의적 냉소주의를 극복하게 합니다. 왜냐면 그 나약함이야말로 인간 문명의 가장 탄탄한 기반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현희씨처럼 된다면? 이라고 묻는 건 자기연민이지만, 우리가 인간일 수 있는 것은 그 자기연민으로부터 시작하여 '내 안위와 관계 없이 인간에 대해 품는 연민' 덕분입니다. 그것이 휴머니즘입니다.

"어차피 이런 사연에 잠깐 슬퍼하다가 또 다시 얼굴 꾸미고 고치는 데 열을 내지 않을 것 아니냐, 본질은 싸구려 감성 팔이다" 라는 식의 극단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특히 인터넷을 중심으로 이런 식의 냉소주의가 유행하고 있는데, 이런 식의 날선 비난은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실망감과 조급함의 표출이라고 봅니다. 그런 극단주의는 오히려 '순결함'에 대한 강박과 다르지 않습니다. 즉, 그들이 인간에게 실망하는 만큼, 인간에게 기대하는 잣대가 높다는 방증이지요. 그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런 비난에 맞서, 우리는 그저 조용히 '기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다가도 다시 지금껏 해 오던 대로 자신을 꾸미고 멋을 내겠죠. 뭐 어떤가요. 자신이 살던 대로 살더라도, 문득 또 다시 현희씨와 같은 이 세계의 '엄연한 비극적 풍경'을 상기하고, 그저 관조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종교적으로는 묵상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것이 쌓이면 내 삶이 조금 더 검소해지고 단순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검소하고 단순해지기 위해 기도를 하는 건 아닙니다. 기도란 '무엇을 위해' 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그 자체로 목적에 가까울 겁니다. 

요컨대, 기도란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인간적 운명과 인간성에 대한 관조입니다. 멀리 있는 타인의 아픔을 듣고, 상상하고, 공감하는 일입니다. 멀리 있는 타인의 아픔의 깊이를 가늠하고, 그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작은지를 인식하는 일입니다. 불교의 초기 경전인 법구경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인기척 없는 빈집에 들어가 / 마음을 가라앉히고 / 바른 진리를 관찰하는 수행자는 / 인간을 초월한 기쁨을 누린다." 아마 기도하는 일은 이렇게 빈집에 들어가서 이 세상을 조용히 바라보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게오르그 뷔히너는 '당통의 죽음'이란 희곡에서 어느 창녀의 입을 빌려 "인생을 가장 잘 즐기는 사람이 가장 잘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라고 썼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엔 '단순한 기쁨'을 쓴 피에르 신부의 말을 덧붙여야 할 겁니다. 그는 이 세상엔 오직 '자신을 숭배하는 자'와 '타인과 공감하는 자'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며, 타인을 향한 사랑과 공감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모르는 건 인생의 비극이라고 했죠. 이들에 따르면, 타인을 아끼고 사랑하며 그들과 진정으로 교감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좋은 기도라는 겁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만나가는 일이 기도입니다. 현희씨의 쾌유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5
Comments
2016-10-22 01:16:12

이렇게 좋은 글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Updated at 2016-10-22 01:46:17

어렵지만 와닿는 글이네요. 연민이란거 정이란거 인간이 인간으로써 살게끔하는 하는 추상체고 기도는 그것을 실현하는 발현체군요

Updated at 2016-10-22 02:01:51

대체로 동감합니다. 저도 무교라 기도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럼에도 많은 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했습니다. 저 역시 타인의 절망이나 고통을 내가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계기나 극복의 발판으로 삼는 것에 극도로 거부감을 느낍니다. 이런 자기 성찰엔 상대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희씨의 사연을 저 역시 인터넷을 통해 접했습니다. 동년배라 그런지 더욱 가슴에 절박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냥 단순한 시각을 내비쳐봅니다. 사람이 선천적이든 (분명 예외적인 경우는 존재하겠지만)후천적이든 육체적, 정신적으로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 선화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게 맞습니다. 이것이 저는 사회의 책무이자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당연한 권리라 사료됩니다. 세상에 불가항력에 기인한 고통의 의무를 지워야 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심지어 자발적 선택인 자살도 그냥 방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든 구제받아야 합니다. 저는 사회가 나아가는 길이 이러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현희씨의 쾌유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16-10-22 02:03:37

작성자 안 보고 아니 누가 이렇게 필력이 좋지 했다가 작성자 이름 보고 수긍했습니다. 저도 요새 성행하는 냉소주의가 참 맘에 들지 않습니다. 물론 각박한 사회가 원인일수도 있지만.. 저도 그 분이 꼭 쾌유하기를 소망합니다.

2016-10-22 08:56:26

sns를 포함하여 근래 본 글 중에 가장 멋진 글이었습니다.

글쓰기
검색 대상
띄어쓰기 시 조건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