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니 갑자기 열이 받네요.
저는 지금 2달 가까이 택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달이나 되는 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여름 옷이죠.
여름 옷을 8월 초에 사는 건 별로 특별한 일은 아닐겁니다.
물론, 그 옷은 중국에서 파는 옷이었고 그래서 구매대행 사이트를 이용했죠.
8월 말... 무더위가 갑자기 식어갔던 8월 말의 어느 날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에 저는 불현듯 생각났습니다. 아차, 나 그때 옷 사지 않았나?
여름이 다 끝나갈 위기인데 옷은 오지 않았습니다.
언젠간 오겠지 언젠간 오겠지...
예. 물론 지금도 안오고 있지만 그땐 그런 마음이었죠.
마치 소븐가드를 기다리는 에보니 워리어의 심정이 저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배송이 비록 좀 개거지같지만 어쩌겠습니까. 물 건너서 여까지 언젠가는 온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배송중이라는 문구가 뜹니다! 요시 그란도 시즌
드디어 내가 내 옷을 받는구나 하고 기쁨에 북받쳐서 오늘일까 내일일까 하고 그저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 그리고 잠깐 목이 빠졌었습니다. 정말 안오더라고요.
알아보니 통관검사중? 이라는 겁니다.
무슨 검사를 이렇게 열심히 하는걸까, 하는 의문이 쪼끔 들다가 말았는데...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지나자 걸려온 전화. 관세법인 ㅇㅅ이라는 곳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조금 띠꺼운 말투로 전화하신 그분은, 니가 산 게 옷이 맞느냐고 물었습니다.
마약은 산 적이 없다고 개그를 쳤는데 한 번에 못 알아 들으셔서 뻘쭘하게 죄송하다고 옷 맞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의아해하면서 주민번호나 통관번호 중의 하나를 부르라고 하셨답니다.
(근데 정말 맹세코 그 둘 다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가서 둘 다 불러줬더니 둘 중 하나만 불러달라고 했다고.
슬쩍 빡쳤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제 옷은 저쪽이 구금하고 있는 것을.
저는 리암 니슨이 아닌지라 찾으러 갈 수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인천은 too far.
고분고분 말 잘듣는 척 하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장례식이 있어서 대낮부터 술을 좀 마시고 얼큰하게 취한 상탠데 문자가 왔습니다.
'창고 보관료 내셈. 안 그럼 님 옷 안 줄거임'
이 길게 쓴 문자의 요지였습니다.
정말 좀 많이 화가 났습니다. 술김에 그래서 쇼핑몰에까지 전화를 했습니다.
"아 저기요. 얼마 전에는 저거 주민번호니 뭐니 불러주면 보내준다 카드만 인자 돈 내라 카는데 우찌 된깁니까" 라는 말을 아주 정중하게 여쭈었더니, 알아보고 연락을 해준답니다.
연락이 다음 날 왔습니다.
돈 거기 입금하고 입금한 내역 보내면 저에게 다시 입금을 해 주신답니다.
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때가 추석 연휴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아, 좀 있으면 그래도 여름 옷을 받아서 9월은 입겠구나.
그리고 어느 날 언제 배송이 올까 하다가 급한 일이 있어서 잠시 좀 멀리 나가 있었더니 택배 기사님이 전화가 오셔서 말씀이
"아, 집 근처에 가서 문 두들겼는데 안 계시길래 집 앞에 두고 가요~"
아 C bar 소리가 절로 나왔네요.
타이밍도 절묘하지 진짜 해도 졌는데 하필 그 시간에. 번호를 보니 늘 오시던 기사님이 아니더군요.
급히 오신 기사님 같았습니다. 전에 늘 오시던 분은 이렇게 안 하셨는데.
급하게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습니다. 이 정도 거리는 원래 유럽 아니면 택시 안 타는 거린데.
집으로 갔더니 웬걸? 부피가 좀 작습니다?
옷을 뭐 교회 전도할 때 주는 행주처럼 물 부으면 커지게 만들었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꺼내봤더니...
아니 이게 뭐야...???
제가 비록 길지 않..은 인생을 산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30년 가량을 살면서 저런 것을 가져본 적은, 아니 만져본 적도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서른 즈음이 되어서 제가 옷 대신 받은 것은 카드캡터 사쿠라의 요술봉이었습니다.
이 나이에 마법을 부리는 요망한 소녀가 될 기세.
순간 사긴가? 생각이 들었는데
어떤 돌대가리가 사기를 치는데 벽돌 대신에 저걸 쓸까 싶었습니다.
쇼핑몰에 전화를 했습니다.
"저기예... 옷이 안오고 카드캡터 사쿠라 법봉이 왓는데예.."
상담원 아가씨도 혼비백산한 것 같았습니다.
"고객님...저..예..?"
"법봉이 왔다꼬예 법봉..."
화가 나서 머리를 쥐어 뜯다가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 스트레스가 정말 탈모에 안좋구나 느끼면서 그저 허허 웃고 있었습니다.
실성한 놈 마냥 한참 웃다보니 너무 당혹스럽고 웃기고...
눈이 거꾸로 돌아갈 것 같더군요.
결국 그날 술을 좀 마시고 나서 집 구석을 둘러보는데, 저놈의 법봉이 눈에 보이는 겁니다.
그래도 어렸을 적 재밌게 봤던 애니니까.
들고 휘둘러 봤습니다. 나와라 크로우카드!
안나옵디다. 짭이네요.
그 이후로 가끔 쇼핑몰과 통화를 했습니다.
님들 내 옷 행방 못찾아 내면 내가 저 법봉 가지고 님들 회사가서 하루종일 크로우 카드를 소환하며 깽판칠거라며.
고객상담 하시는 여성분의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는 입술이 씰룩거리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릴 지경이더군요.
지난 주까지 그래서 내 택배..내 택배.. 하면서 자다가도 이빨을 덜덜 갈면서 쇼핑몰의 연락을 기다렸네요.
어느 오전에 전화가 옵디다.
반가운 목소리... 그분과 거의 썸타는 수준으로 자주 전화를 했더니 목소리만 듣는데 왈칵 반갑더군요.
"반가워예~ 잘 지내고 계시죠? 오랜만이네요~"
했더니 행방을 찾았다는 겁니다. 중국 의류상인이 벽돌 대신 법봉을 보낸게 아니라
배송대행지에서 실수를 한 거라고 하네요. 오 부처님 보살쓰 나이쓰
그게 지난주 금요일이었습니다. 바로 택배를 보냈죠.
가는 길에 저 법봉을 들고 한참을 가다 보니, 길에서 사람들이 다 저를 쳐다보는 겁니다.
뭐가 문제가 있나? 생각하는 찰나에 옆에 비친 건물의 유리창.
백호가 앞뒤로 가득한 티셔츠에 쪼리를 신고 머리는 올빽을 한 채로 사쿠라 법봉을 들고 히죽거리며 웬 건장한 사나이가.
아... 그럴만 하네.
그래서 가는 길에도 또 했습니다.
나와라 크로우카드!
안나오더군요. 그놈의 몽둥이 참 고집 셉디다.
우체국에 갔더니 외국인 손님도, 우체국 직원들도 전부 행색이 괴상한 미친놈 하나를 봤다는 눈빛들.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나와라 크로우카드! 한 번 더 했습니다.
남자 직원분께서 "오늘 저녁에 인터넷에서 볼 수도 있겠네요" 하고 웃음을 한껏 참으셨습니다.
저도 그래서 "그럼 댓글 많이 달고 퍼날라 주세요 크흐흐흫"하고 약간 등신같은 웃음을 웃었습니다.
물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제 7일이 지났는데 아직 안 오고 있습니다.
저는 당일 보내드렸는데... 그분은 깜빡하고 안보내셨다네요.
아마 제 생각에 내년 여름이 되면 갑자기 시키지 않은 택배가 올 것 같네요.
모르는 사람 하나가 "마 인자 여름인데 여름 옷 이거 입으라" 하면서 그때 시킨 그 옷을 주진 않을까...
하 글을 쓰다보니 또 속이 부글부글 끓네요.
잠시 염불하고 향 좀 피우러 가겠습니다.
중국에서 물품 사실 때 조심들 하셔요.
정체모를 법봉이 정체모를 젤리랑 같이 올 수 있어요.
글쓰기 |
죄송합니다 진짜 엄청 웃었네요
힘내세요!! 그래도 북두신돈님이 진짜 보살이시네요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