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과 현재 일반인 중에 누가 삶의 질이 높을까?
어제 올린 글에서 현재 저의 삶의 질이 대부분의 항목에서 조선의 왕보다 높다고 한 바 있습니다. 물론 그 비교는 저의 개인적인 특징과 성격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 글에서 이어갈까 합니다.
조선 왕의 식사는 하루에 다섯 번 이루어졌습니다. 정식 식사는 아침과 저녁 수라이고, 나머지 세 번은 간식과 야참입니다. 아침과 저녁 수라는 백여 명의 궁중 요리사가 전국에서 진상된 각종 산해진미로 최고의 식단을 만들었습니다. 식단 하나하나에는 영양의 조화는 물론 품위와 배려가 들어있었고 한의학적으로 우주의 섭리를 담고 있었습니다. 국왕은 매일 홀로 아침과 저녁 수라를 받았습니다. 국왕 뿐 아니라 벼슬을 가진 양반도 집에서 독상을 받았습니다.
평범한 집안에서도 남녀를 구별하는 관습 때문에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모여 먹었습니다. 부부유별이라는 유교 윤리는 궁궐 뿐 아니라 양반의 가옥에서도 부부의 생활공간을 분리했는데, 안채에는 여성들이 살았고 남자들은 바깥의 사랑채에서 기거했습니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안채에 살았기에 안사람이라 불렸고, 남자들은 바깥의 사랑채에 산다고 하여 바깥사람이라 불렸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사용되는 단어들입니다. 궁궐에서 왕의 침전과 왕비의 중전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왕과 왕비는 평상시에 별도의 공간에서 생활하고 제사 등 의례가 있을 때나 길일 등에 부부가 합방할 때만 서로 만났습니다.
조선의 왕은 백여 명이 온 정성을 들여 만든 수십 가지의 산해진미를 매일 홀로 접하지만 식도락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조선 왕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초라합니다. 전속 요리사는 없지만 제가 퇴근길에 들리는 저의 아파트 바로 앞의 롯데마트에는 조선의 왕이 경험해보지 못할 만큼 다양하고 신선한 음식들이 널려 있습니다. 5분만 더 걸으면 뉴코아와 킴스클럽이 있고, 거기서 5분만 더 걸으면 신세계 백화점이 있습니다. 거기에다 저와 가족들의 기분에 따라 주변에 있는 수많은 한식, 중국식, 양식, 이탈리아식, 일식 레스토랑 중에서 아무데나 고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식당에는 숙련된 요리사와 웨이터들이 저와 가족들을 위해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고, 음식을 먹고 식중독에 걸릴 위험도 조선왕보다 훨씬 적습니다. 물론 조선 왕의 궁중 요리사와 달리 이들은 저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은 저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한테는 조선 왕이 가진 마차나 마부가 없는 대신 어디든 움직일 수 있는 승용차가 있습니다. 이코노미 클래스 항공노선의 표를 사면 숙련된 조종사가 저를 미국까지 데려다 줍니다. 저에게는 여름에 부채질을 해주는 궁녀들이 없지만 에어콘이 있고, 겨울에 땔감으로 방을 덥혀주는 하인은 없지만 중앙난방이 있습니다. 나를 위해 양초 심지를 조절해주는 하인은 없지만 스위치만 누르면 곧바로 밝은 빛이 들어옵니다. 메시지나 소식을 전달해주는 전속 심부름꾼은 없지만 우편배달부가 있고, 이메일이 있고, 휴대전화가 있고, 신문이 있고, TV가 있고, 그런 게 너무 많아서 일부러 SNS는 하지도 않습니다. 저의 아들과 딸은 부모가 어린 시절을 인터넷과 휴대폰이 없는 세상에서 보냈다는 것을 믿지 않을 정도입니다.
방에 붙어 있는 목욕실에서는 항상 깨끗한 냉수와 온수가 나와 언제든 몸을 청결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방 안에는 세계의 일류 뮤지션들이 나를 위해 연주하고 노래한 수백장의 CD들이 있습니다. 물론 저만을 위해 연주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연주한 것이지만 저한테는 아무 차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에게 전속 재단사는 없지만 인터넷만 찾아봐도 세계 각국의 공장에서 수백 개의 재료로 만들어진 수백만 가지의 제품이 있습니다. 제가 뻔한 이야기를 중복적으로 쓴 이유는 우리가 매일 호흡하면서도 공기의 소중함을 못 느끼듯이 현재 누리고 있는 문명의 혜택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안타까워서입니다.
우리가 현재 받고 있는 의학과 약학의 혜택을 생각하면 조선시대 왕이 부럽다는 생각이 더더욱 들기 힘들 것입니다. 조선의 왕은 전속으로 건강을 돌봐주는 16명의 어의와 내의원(내약방)이 있습니다. 왕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거나 오래 차도가 없으면 이들에게 엄한 문책이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왕이 심한 병에 걸렸을 때 내의원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없는 수준입니다. 현대인에게 아무것도 아닌 종기조차도 항생제가 없던 조선시대에는 합병증을 일으켜 종종 왕의 목숨을 앗아가는 엄청난 질환이었습니다. 당시 맹장염은 현대의 불치병이라는 말기 최장암보다도 더 사망률이 높았습니다. 치통에도 속수무책이었으며, 왕비들에게는 출산이 생사의 갈림길이었습니다. 게다가 궁궐일지라도 그 위생수준은 현대의 관점에서는 처참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 안해도 이해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조선 왕의 사생활은 현 시대 기준으로는 거의 인권 유린 수준으로 침해당했습니다. 한마디로 왕의 어떤 프라이버시도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왕후와 동침하는 순간에도 내관과 상궁이 지척에서 입직했습니다. 물론 비상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현 시대 기준으로 조선 왕 프라이버시 침해의 절정은 대소변조차 공개로 치르는 것입니다. 물론 당대의 왕은 그런 일들에 너무 익숙해서 신체의 특정 부분이나 특정 행위에 대한 수치심은 전혀 없도록 자라났을 것입니다. 조선에서 왕에게 배정된 화장실은 없었습니다. 그 대신 왕이 요의나 변의를 느끼는 경우 복이나인이라고 불리는 담당 궁녀를 호출하면, 그 궁녀는 매화틀 요강을 들고 달려오고 왕은 궁녀와 내관 그리고 상궁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변을 했습니다. 대변을 마쳤을 때에는 상궁이 명주 수건을 들고 섰다가 깨끗이 닦아드렸고, 그 대변은 곧바로 어의에게 보내졌답니다.
권력의 정점인 조선 왕은 매 순간 자신에게 도전하는 새로운 권력의 출현을 의심했습니다. 연좌제라는 잔인한 형벌은 왕의 권력을 넘보려고 하는 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공포였지만, 조선시대 왕들의 의심은 고질병에 가까웠습니다. 최악의 왕에 단골로 꼽히는 인조의 경우 청나라 심양에 억류되었던 소현세자 부부가 돌아왔을 때 광기가 표출될 만큼의 스트레스가 폭발했습니다. 소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모자라 강빈에게 사약을 내렸을 때 인조의 정신 상태는 정상인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강빈의 다섯명의 궁녀는 모두 고문 끝에 사망했고, 강빈의 오빠와 동생은 모두 곤장을 맞다 형틀에서 사망했습니다. 왕의 자리라는 권력 앞에서는 부자관계나 형제관계는 인륜보다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조선의 모든 왕들이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의 왕들 중에서 가장 비정상적이고 변칙적인 방법으로 왕위를 승계한 인물은 10대 성종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종은 친형인 월산대군과 끝까지 우애를 지켰습니다. 여기에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월산대군에 대한 성종의 배려는 갈등 무마 차원이 아니라 진심으로 형을 위하는 마음에서였다고 생각됩니다.
이 글의 내용과는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저는 작년 봄 영월에 다녀왔을 때의 느낌을 잊지 못합니다.
/g2/bbs/board.php?bo_table=freetalk&wr_id=1845928
작년 봄에 제가 영월에 갔을 때 단종이 승하한지 550년이 넘게 지났지만 그곳에 단종의 흔적이 너무 많이 남아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단지 유적이 보존된 정도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단종을 신격화한 흔적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초기로부터 많은 인물들이 여러 정치적 사건과 관련하여 유배를 당했지만, 전왕이 유배되는 상황은 전대미문의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영월에서의 유배생활은 단종과 지역민을 하나로 결속시켰고, 단종을 가까이에서 체험한 영월 지역민들은 그들의 삶 속에 단종을 깊이 간직할 수 있게 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단종이 비극적으로 최후를 맞이한 후에 영월 주민들은 단종을 지역 신으로 모심으로써 아픔을 완화시키고 단종과의 관계를 종교적 관계로 정상화 시킨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경상도 순흥에서도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난 금성대군이 오래 전부터 신격화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작년 봄에 저는 영월에서 뜻하지 않게 단종에 취한 채로 돌아왔고 그 여운이 아주 길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서울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영월의 백성들도 나랏님에 대해 깊은 애정과 존경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했던 하루였습니다.
2016-07-23 01:43:21
우리가 어릴적에 투명인간이 된다면 여탕을 가보고싶다 라고 1차원적으로 생각하듯, 왕이 되면 원하는 여자는 다 내꺼! 라는 단편적인 생각으로 왕의 삶을 부러워 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별개의 이야기이지만, 북한에서 서열 30~50위권 정도의 삶보다 한국 대기업 부장급의 삶이 몇배는 더 윤택하다는 이야기를 어느 교수님께 들은적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근거나 바탕은 둘째치고, 가끔 제가 궁금한 것은, 과거와 현재의 삶의 질을 비교하는것은 문명의 발달이라는 갭으로 인해 공평하지 못한 비교같은데,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북한의 장성급들과 우리나라에서 돈좀 번다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실제 삶의 수준은 어느수준으로 비교가 가능할까 궁금증을 종종 가져봅니다.
5
2016-07-23 01:47:36
조금 다른 얘기지만, 현대 사회에서 양극화가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면서도, 과거와 비교하면 상위 0.1%라고 할만한 사람들과 중산층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의 갭이 가장 적은 시기라고들 하더군요. 전용기 vs 이코노미석, 마이바흐 vs 아반떼 등 차이가 있더라도 그렇게 의미가 큰 차이는 아니라는거죠. 소득의 차이가 크더라도, 누릴 수 있는 것은 결국 비슷한 것 같습니다. 3
2016-07-23 02:50:25
저는 지금 제삶에 아주 만족하는 편입니다.. 금수저와 정반대인 흙수저지만 저의 좌우명이 몸건강이 살고있는것에 감사하자여서..
2016-07-23 08:33:49
조선시에대에는 예인이랑 사나가 없었죠. 사나없이 어떻게 사나...ㅜㅜ
2016-07-23 08:58:44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에 만족하며 미래를 꿈꾼다. 이런 얘기가 생각나네요. ^^
2016-07-23 09:08:32
1960년대 정도 전까지는 전세계 최고부자도 지금 우리주변 평범한 사람만 못했을거라고 봐요
2016-07-23 09:56:54
왕이 평상시 부부가 다른 공간에서 생활한것만 빼면 제 삶에 더 만족하네요
2016-07-23 10:05:01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7번째 문단, 최장암은 혹시 췌장암 말씀하시는건가요..? 1
2016-07-23 10:18:54
지금 같은 혹서때 가장 극명하죠. 전기료 부담 감수하면 에어컨 틀고 편히 지낼 수 있는 우리가 승자.
2016-07-23 12:34:08
췌장암인데 최장암으로 되어있네요
2016-07-23 14:13:19
노벨경제학상 탔던 앵거스 디턴의 책이 얼추 이런 주제였던 것 같습니다 1
2016-07-23 15:34:38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만 자연을 벗삼으려고 한다면 반대의 결과가 나올꺼 같습니다 그 시절에 더위와 추위와 목마름이 대단했지만 그런 어려움을 느끼는 삶이 더 자연스러운 거 같거든요(지금도 에어컨이나 난방의 도움 없이 살아가는 이들도 제법 있으니까요) 훗날 후손들은 우리의 삶을 그대들과 비교하면서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흥미롭습니다 어느 시절이나 삶이 무엇인지 사람간의 관계는 무엇을 중심으로 고민해야 하는지 세상을 이롭게 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비슷하게 고민할수 있을까요? 이 점이 궁금하네요. 과연 이 시대의 사람들이 성찰하면서 살아갈지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그럴지 우리의 후손들이 그럴지가 궁금합니다 분명 왕은 고달프고 원하지 않던 삶일순 있겠습니다 그래도 본인이 뜻하는 바가 있던 왕이라면 제한된 국력과 인력과 능력으로 고생하는 백성들과 흔들리는 나라를 어떤 지점부터 고민하고 좋게 만들지 의미있는 시도를 해볼수 있을꺼 같네요. 실패하더라도 자신의 명예를 걱정하진 않을수 있을꺼 같네요 더 뜻있는 이들을 발굴하지 못한 걸 안타까워하겠지만요 조선시대 왕이나 벼슬아치 사대부들은 자연을 벗삼은 게 아니라 물질적으로 풍족했습니다. 현재를 기준으로 한다면 풍족 속에 부족일 수 있지만 일반인들보다는 엄청 풍족했습니다. 느린 시대였기 때문에 사유가 깊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분들이 남겨놓은 문학작품을 보고 그들의 삶을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당시 높은 분들의 글과 행동이 다른 것은 요즘 정치인들보다 훨씬 더했습니다. 알수록 치가 떨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이 불일치하는 것을 제외하면 퇴계, 사림에 의해 도입되고 퇴계, 율곡 시대에 꽃피기 시작한 성리학은 국가의 통치를 공공의 안녕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려는 노력했던 것은 맞습니다.
2016-07-23 18:35:20
다른것보다도 제가 왕이었으면 기본 하루 3차례씩 진행되어 그것들을 부르던 용어가 따로 있었던 경연이나 신하들의 조언을 빙자한 고도의 비판들을 견딜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경연은 말씀처럼 하루 3차례씩 진행되었는데, 매일같이 승지가 다음날 경연을 실시할 것인지의 여부를 왕에게 묻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권은 신권보다 훨씬 막강했습니다. 국왕은 공식적으로 법 위에 있었고, 왕의 말이 법이 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렇게 왕의 영향이 크기 때문에 경연 등을 통해서 국왕의 수양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뛰어난 군주는 경연에서 신하를 압도함으로써 통치력을 강화했고, 반대로 세조, 연산군, 광해군처럼 경연을 게을리했던 군주도 있었습니다. 조선 관료제의 정점에 국왕이 있었고, 원칙적으로는 왕의 행동을 통제하는 유일한 수단은 스스로 권력 남용을 자제하도록 유도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이 움직이던 것은 제도보다 인치에 가까운 면도 있었기에 중종처럼 실권이 없던 왕도 있었고, 명종처럼 모친에게 휘둘리던 왕도 있었습니다. 순조 때부터는 조선을 지탱하던 성리학도 노년기에 들어서 모든 게 엉망으로 변하기는 했습니다만 조선의 왕권은 현대 대통령의 권한과는 비교조차 안될 정도로 막강했습니다. 급하게 쓴 댓글을 다시 읽어보니까 제가 dirichlet 님의 글에 반대하는 입장같이 되어 버렸네요. 그런 뜻은 아니었고, 조선은 모든 중요한 것들이 왕명을 통해 집행되된 시기였기에 왕의 책임과 권한이 엄청났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2016-07-23 20:46:42
상세한 답변을 읽어 보니 2번째로 달아주신 댓글에서 나오는 '왕명을 통해 집행'이 포인트 같네요. |
글쓰기 |
여기서 오행의 원리가 궁금한 분이
한 서른 분이 넘으시면 그에 대해 저라도 썰을 풀어보죠.
베일리님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