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던 나라
지난 주에 발해가 우리나라의 역사인가에 대한 질문이 매니아 게시판에 올라왔는데, 거기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지만 브렉시트에 대한 글에 밀려 지금 올립니다.
발해 왕조의 역사는 15대 229년입니다. 우리나라 왕조의 역사로는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제외하면 가장 짧지만 중국의 왕조와 비교하면 짧은 역사가 아닙니다. 발해의 영토는 우리나라 왕조 역사상 가장 넓지만 중국 내 소수민족 왕조의 영토로서는 넓지만 아주 넓은 편이 아닙니다. 발해의 영토는 지금의 북한, 중국(동북 삼성) 그리고 러시아(연해주)에 걸쳐 있습니다.
발해의 역사는 한국, 북한, 중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에서 연구되어 왔는데 대조영의 핏줄, 건국의 주체, 민족의 구성, 문화의 성격, 현 시점에서 국가 귀속 등에서 각 나라마다 너무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앞으로도 합일점을 찾는 것은 매우 힘든 상황에 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이 말갈족을 규합하여 옛 고구려 지역에 건국하여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지역,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229년 동안 존속하며 주변국과의 활발한 교류 속에 해동성국(海東盛國)을 구가했습니다. 하지만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그 지역을 방치하였고, 후속 국가도 등장하지 않은 데다 발해인 스스로 남긴 역사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음으로써 오랫동안 역사에서 잊혀졌습니다.
중국은 중국사의 범위를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 있었던 과거의 역사 모두로 잡고 있어 발해는 물론 고구려까지 자국 역사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중국 역사학계는 한국 고대사만이 아니라 소수민족 역사를 영토저거 관점에 뿌리를 두고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동북공정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발해국의 성격을 중국의 소수민족 자치국이라 규정하고 그 성격은 지방정권아라고 하여 발해와 당시 당나라와의 관계를 지방과 중앙의 관점에서 인식하고 있으며 동북공정 이후에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발해 유적에 대한 정비를 통해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하려고 시도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조만간 발해문화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단독등재도 시도할 가능성까지 보입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이 주축이 되어 건국했고 상류 지배층을 형성하였으므로 발해사를 우리나라 역사에 포함시킬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국내 학자들 사이에서도 한국사 귀속 문제에 이견이 있는 중요한 이유는 발해사서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왕조가 바뀌면 새 왕조는 이전 왕조에 대한 역사서를 편찬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고려는 발해에 대한 역사서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조선 전기와 중기까지도 발해에 대한 연구는 진행되지 않았고, 발해사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실학자들에 의해 활발히 연구되기 시작했습니다.
실학자들은 당면한 사회현실을 직시하고 그 문제점을 개혁하려고 노력했던 만큼 자국사에 대한 관심도 높았습니다. 그들은 발해에 대한 오랜 기간 지속된 관심의 부재와 사료의 부족 속에서도 조선이 약소국이 되어 일본과 청국의 침략을 받게 된 역사적 원인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보수적인 실학자였던 안정복은 정통론에 입각하여 국사를 정리한 「동사강목」을 편찬했습니다. 1778년(정조2년)에 완성된「동사강목」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역사서로 정통론에 입각하여 발해를 우리나라 역사와 무관한 주변국으로 인식했지만 발해에 대한 새로운 자료 발굴과 사실에 대한 고증 및 해석으로 이후의 발해사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동사강목」에 의한 새로운 사실의 발견은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 관계에 대한 연구에 불을 지폈습니다. 이종휘는 「동사(東史)」에서 발해사를 국사에 포함시켰고, 박지원의 제자인 유득공은 1784년(정조 8)에 신라와 발해가 양립한 남북국론을 제기한 「발해고」를 출간했습니다.
「발해고」는 발해사에 대한 최초의 단독 저술이고,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분명히 하면서 발해 유민의 부흥운동과 일본의 교섭관계까지 망라할 정도로 많은 자료를 섭렵했습니다. 현재 많은 사학자들은 유득공의 「발해고」 우리나라에서 발해사 연구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이후 한치윤의 「해동역사」는 발해사에 대한 모든 사료를 망라하고 있습니다. 「발해고」와 「해동역사」는 정약용의 「강역고」와 함께 발해사에 대한 치밀한 고증을 통해 현재의 통설에 가까운 견해들을 제기하고 있었습니다.
실학자에 의해 제기된 남북국으로서의 발해사는 개화기와 구한말을 거치면서 근대역사학으로 무장한 일본의 만선사관에 의해 왜곡되었으며 다시 우리학자들의 발해사에 대한 관심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20세기 초까지 일본은 발해를 한국사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일본이 만주를 점령한 이후 고고학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많은 유적이 발굴되었고, 이를 통해 발해의 문화는 고구려 문화를 계승한 것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그 이후 발해사를 한국사에 포함시켰고, 이미 일본을 한국사의 종주국으로 하는 대동아공영권의 구상 속에 일본을 중심으로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왜곡했습니다.
일본은 발해와 빈번한 교류를 가졌고 기록을 중시했기 때문에 일본의 사서나 문학작품에 발해와 관련된 기록이 여러 곳에 등장하고, 일본 내에 발해 유적지까지 존재함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연구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일본에는 속일본기를 비롯해 발해 관련 역사서 및 금석문 자료와 유적 등 발해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들이 보유되어 있습니다. 만주 점령 이후에는 발해사를 일본사의 범주에 넣었고, 2차 대전 패전 이후에도 만주 점령시기에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예전부터 일본 내에 존재했던 발해사 연구에 중요한 1차 사료 등을 바탕으로 발해사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뤄졌습니다. 일본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발해의 문화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일 뿐 아니라 왕권의 기원과 정통성을 고구려에서 찾았다고 보기 때문에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에 넣는 경향이 강합니다.
19세기 초의 실학자 이후 완전히 맥이 끊기다시피 한 국내 학자의 발해사 연구는 1960년대부터 조금씩 이뤄지기 시작하여 1970년대까지는 동국대 이용범 교수가 일본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수용하면서 주도해 나갔습니다. 1980년대까지는 이용범 교수가 발해사의 모든 분야를 주도적으로 연구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학자들이 발해사의 특정 분야를 연구하면서 인접 학문과의 접목을 시도하는 성과도 나오고 있습니다. 2000년대 들어 발해사 연구는 중국의 왜곡적인 역사팽창주의에 자극을 받아 국내에서 더욱 많은 연구 인력이 투입되어 성황을 맞고 있습니다.
러시아 학자들은 발해가 기본적으로 다민족국가였다고 생각합니다. 말갈족이 발해의 다수를 차지했고, 고구려인들이 그 다음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였으며 그 밖에도 수는 많지 않았지만 여러 민족들이 발해를 구성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이유로 러시아 학자들은 발해 문화의 성격에 대해 독자성과 다원성을 강조합니다. 국가 귀속문제와 관련해서 러시아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발해가 말갈계이 독립주권국가였다고 의견일치를 보입니다. 발해의 건국자와 관련해서도 러시아 학자들은 말갈인들이 발해를 건국했다고 주장하는데, 많은 경우 중국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참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러시아의 학자들은 언어문제도 있고, 유물 해석방식과 역사인식이 너무 달라서 서로의 연구결과를 거의 인용조차 안하는 실정입니다.
이렇듯 현재는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발해 역사는 동아시아 어느 왕조의 역사보다 더 많은 쟁점을 낳고 국제적인 관심을 고조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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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가 생각나네요
좋은 밤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