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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인 일본의 풍속화와 그것을 사랑한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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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6 02:12:27
우키요에(浮世絵)는 일본의 에도 시대(1603~1867)에 성립된 풍속화로, 보통 서민들의 일상  생활이나 풍경, 풍물 등을 그려낸 목판화를 말합니다. 에도의 문화는 상인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남자들의 속성은 물질적인 부가 충족되면 유흥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에도시대에는 부를 이룬 도시민을 위한 유곽과 가부키가 도시마다 생겨났는데, 화가들은 대중문화의 원천인 유곽과 유녀, 가부키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은 고가였지만, 만일 똑같은 그림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다면 값도 싸고 일반대중도 구매하기 쉬웠겠지요. 당시 목판 인쇄술이 발달은 우키요에가 탄생할 수 있었던 조건을 완성했습니다. 목판화 제품인 우키요에는 대량생산이 가능했던 이유로 부유하지 않아 원화를 비싼 값에 구입할 수 없었던 도시의 서민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우키요에는 초창기에 마을의 일상생활, 유곽의 창부들, 스모 선수들, 유명 가부키 배우들의 초상화, 예술 공연 등을 많이 담았으며, 이후에는 고전문학, 풍자 및 명승지 등 각종 풍경화도 널리 제작되게 되었습니다. 대중 예술이면서도 우키요에의 독특한 구도와 재밌는 묘사, 그리고 특유의 표현력은 당시 세계적인 기준으로 봐도 예술가들을 매혹키는 힘이 있었습니다. 현재 일본의 애니메이션 코믹은 세계에서 독보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데, 아마도 그때부터의 흐름을 타고 있어서일 것입니다.

우케요에의 창시자 격인 히시가와 모로노부, 미인화로 유명한 키타가와 우타마로, 인물의 다이내믹한 묘사로 인기를 얻은 도슈사이 샤라쿠, 풍경화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가쓰시카 호쿠사이, 우타가와 히로시게등 저명한 화가 외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무명 우키요에 화가들이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아래에 유명한 우케요에 몇 작품을 첨부합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 후지산

기타가와 우타마로, 거울보는 여자

도슈사이 샤라쿠, 2대 오타니 오니지

우타가와 히로시게, 시장

우타가와 히로시게, 가메이도의 매화가 있는 찻집 :  이 작품은 빈센트 반 고흐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

히시카와 모로노부, 뒤돌아 보는 미녀 : 컬러 우키요에의 효시격인 작품임

우키요에 작품들 중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바로 성애를 묘사한 춘화(春画, 일본발음 슌가)입니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우키요에 하면 춘화를 가장 먼저 연상할 정도로 수많은 작품들이 전해지고 그 디테일한 묘사는 도저히 매니아 게시판에 옮겨올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노골적입니다. 구글에서 浮世絵 春画로 검색하시면 수많은 노골적인 19금 우키요에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춘화가 점잖은 학자들의 미술사 연구대상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재야 학자들과 미술 수집가들이 꾸준히 연구하고 성과를 축적한 덕분에 최근에는 우키요에 춘화에 대한 국제적인 학술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에도시대의 대표적인 풍속화라고 할 우키요에를 춘화로 연상할 정도라는 것은 그만큼 당시 일본인들이 성에 대해 개방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들의 성의식에서 찾을 수 있는데, 예로부터 일본인들은 성을 인간과 자연이 함께 번영하는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영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옛부터 일본에서 결혼은 집안 간 (정략적인) 결합으로 성립되는 것으로 결혼 전 남녀의 성관계는 별개의 문제였으며, 문제시 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우리나라와 달리) 신부가 처녀보다는 성경험자이기를 바라는 경향도 강했는데, 이는 성이 개방되어 있는 당시에 성숙한 여자가 처녀로 남아 있다는 것은 여자로서 매력이 없거나 신체적으로 어떤 결함이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일본에는 역사적으로 혼욕문화가 있으며, 현재도 일부 온천을 중심으로 한 혼욕탕이 존재합니다. 1791년에 도쿠가와 막부가 혼욕 금지령을 내렸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하여, 1869년에 다시 혼욕 금지령을 내렸을 정도였습니다. 메이지 유신 후 일본 내무성은 1900년에 혼욕 금지의 연령을 12세 이상의 남녀로 규정지었고, 현재는 각 자치현이 조례에 따라 남녀 혼욕을 금지하고 있으며, 나이에 대해서는 자치제마다 다릅니다. 목욕에 대한 우키요에는 따로 첨부하지 않겠습니다.


1854년 일본이 문호를 개방한 뒤 많은 일본 제품들이 유럽에 수출되었고, 1867년 파리 엑스포(만국박람회)는 소위 자포니즘(japonisme)을 유행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파리 엑스포를 통해 일본의 민예품이 대거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때 우키요에는 유럽으로 수출되는 도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구겨지고 뭉쳐져서 일본 도자기가 깨지지 않도록 완충제 구실을 하고 있었습니다. 구겨진 우키요에를 펼쳐보던 마네, 드가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은 그 화려한 색채와 확고한 윤곽선, 역원근법을 사용한 파격적인 평면감에 경이를 느꼈습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후 대량의 우키요에가 해외로 수출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자포니즘은 1870년대 파리의 문화계와 사교계를 강타했고, 인상파 화가들뿐만 아니라 귀족과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포니즘에 빠져들었습니다. ‘서양미술사’의 저자로 잘 알려진 미술사학자 E.H. 곰브리치는 인상주의가 인기를 끌게 된 이유는 중 하나를 우키요에로 지목했을 정도입니다.


클로드 모네, 기모노를 입은 여인

빈센트 반 고흐는 그 어느 인상파 화가보다 우키요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의 고향 네덜란드는 막부가 쇄국정책을 유지하던 시대에도 유럽국가 중 유일하게 일본과 교역을 했기에, 고흐는 일찍부터 일본으로부터 온 도자기, 공예품, 우키요에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흐의 일본 미술에 대한 열광은 1886년 그가 파리로 옮겨온 뒤에 시작되었습니다. 파리에 오기 전 그는 ‘감자를 먹는 사람들’ 같은 어둡고 칙칙한 사실주의 풍의 그림을 그렸지만, 파리 정착 후 차츰 그림이 밝고 화사해지기 시작했고 전체적인 느낌이 경쾌해졌는데 그 원인은 바로 우키요에였습니다. 고흐가 우키요에에 매료되기 전 그의 가장 큰 스승은 밀레였지만 우키요에를 본격적으로 접한 후, 영원한 우상으로 떠받들었던 밀레를 버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키요에에 빠진 후 반 고흐는 더 이상 밀레의 작품을 모사하지 않다가 자살하기 얼마 전 밀레를 모사하는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파리에서 고흐의 우키요에에 대한 열정도 점차 커졌으며, 매우 싼 값의 우키요에를 대량으로 구입하고 조직적으로 수집하였습니다. 고흐와 그의 사망 때까지 400점이 넘는 우키요에를 동생 테오와 함께 수집했습니다. 고흐는 우키요에의 꼼꼼하고 사실적인 묘사에 매료되었으며,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의 작품을 명확하게 이해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 중 두 개의 그림을 소개합니다. 고흐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한자까지 그림에 그래도 삽입했습니다.





고흐는 평생 30개 이상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그들 중 유명한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의 뒤편에 우키요에가 보입니다.




고흐의 1887년 작품 탕기영감은 두 말이 필요 없이 유명한 작품입니다. 탕기는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화방을 운영하던 노인으로 가난한 화가들의 그림을 묵묵히 받고 물감과 붓 같은 화구를 제공하던 분이었습니다. 가난하게 타계했지만 현대 미술사에서 엄청난 족적을 남긴 분이기도 합니다. 고흐는 탕기를 모델로 3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 중 가장 걸작이고 배경으로 그려진 우키요에들로 더 유명한 그림입니다.



2007년에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빈센트 반 고흐 전시회가 열려서 역대급의 성황을 누린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장 실망했던 건 서울 전시에서 고흐가 그린 그림들 가운에 우키요에는 물론이고 일본풍의 소재가 들어간 작품들이 모두 빠진 점이었습니다. 제가 들은 건 고흐가 가장 사랑했던 나라가 일본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우리 국민들이 알면, 한국 국민들의 고흐 사랑이 식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기획사 측에서 일부러 배제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고흐는 일본에 가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척박한 현실이 아닌 머나먼 미지의 이상 세계로 일본을 받아들였을 뿐인데, 그것을 왜색 찬양이라고 폄하하면서 감추려고 하는 그 발상이 저에겐 너무 신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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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6-05-26 02:16:23

있는 그대로 대상을 바라보고

또 대상의 입장에서 사유해보고

자신의 것으로 채화하는 과정을

못 믿고

알량한 목적으로 가감을 한다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WR
2016-05-26 02:24:07
말씀에 공감합니다. 편한 밤 되세요^^
2016-05-26 02:23:02

아버지와 함께 07~08 그해 겨울의 반고흐 전을 갔던 기억이 나네요. 당시 나이가 어려서, 혹은 식견이 미천하여 그 좋은 전시회에서 큰 감흥을 받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에 반해 12년부터 13년 사이 겨울에 열렸던 두번째 전시회는 그래도 처음 갔을 때 보다 조금은 공부를 하고 갔던 이유에서 인지 조금은 더 감명받고 조금은 더 즐겁고 참신했던 기억이 납니다. 만약, 다시 기회가 된다면 07년 그해 겨울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그 전시회를 볼 수 있다면 좋겠네요.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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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6 02:26:23

저는 07년에 갔습니다. 그 해에는 우리나라에 좋은 전시회가 유난히 많았습니다. 고흐 전에서는 감동도 하고 실망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고흐의 인생을 깊게 파헤쳤지만 여전히 그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은 너무 멀고 어렵습니다. 편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2016-05-26 06:04:43

얼마전에 반고흐인사이드 라는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영상과 음악으로 그림을 보는 전시였는데, 거기서는 고흐가 일본영향을 받은걸 제대로 설명하더군요.
그림 진품이 없어서 시시할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볼만한 전시였습니다.

2016-05-26 07:56:46

저도 봤습니다. 프로젝션맵핑과 스토리 텔링을 이용한 전시였죠.

작품 한점도 없이 전시를 해 낸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2016-05-26 08:08:39
자포니즘하니 툴루즈 로트렉도 떠오르네요. 이 분도 자포니즘과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고흐처럼 요절했죠. 고흐의 친구기도 했고요.
이사람 이야기도 재미있더군요.

고흐 전시에 가서 아이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을 보고 좀 신기했습니다.
고흐의 인생이 아이 교육에 권장할만한 스토리라고는 좀 생각지 않아서^^;
아이들도 하나같이 고흐를 잘 알고, 어머니들도 고흐를 설명하기 위해
공부를 해서 애들에게 알려주고... 엄청나게 인기 많더군요.
2016-05-26 08:33:15

전 이상하게 일본화만보면 고스톱이 생각나더라구요...

2016-05-26 08:55:58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읽을때마다 정말 감탄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관심없는 분야가 미술입니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정말 못 그렸고, 지금도 사람형태조차 못그립니다...
고흐가 일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건 저처럼 미술 젬병이나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겐 거의 충격일지도 모르겠네요. (일단 저는 매우 충격받았습니다...그 시절에 일본 그림이 거기로?!?!)
미술에 관심이라도 가져볼까해서 '그림의 힘' 이라는 책까지 사서 봤는데도 전 전혀 감흥이 안느껴져요....
다시 한번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일본 제국주의 다음 글 기대하고 있습니다!!)


2016-05-26 13:37:37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2016-05-27 00:01:01

일본 애니의 H씬들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군요.. 표현이나 상상력이 지금과 조금도 다를게 없다는 점이 놀라울 뿐입니다.
일본과 화란과 가까웠다는 점은 알았지만 고흐가 일본 춘화의 영향을 받았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오늘도 배워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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