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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 이미 멸망한 인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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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6-04-29 01:13:41
일부 스포가 있으나 영화 관람에 지장이 될만한 부분은 제외했습니다.

"It's a very tragic story about the end of the human race.
 I was as true to Stanley Kubrick's vision as I possibly could be." -Steven Spielberg-

"이 영화는 인류의 마지막에 대한 아주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전 최대한 스탠리 큐브릭의 비전(vision)과 근접하기 위해 제 모든 걸 다했습니다." - 스티븐 스필버그-

A.I.는 스탠리 큐브릭의 손길에 의해 1970년대에 처음 기획이 시작된 이후 계속 미뤄지던 중 그의 죽음을 계기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의해 2000년대에 들어서야 완성이 된 영화입니다.
인간의 사랑을 받기 위해 사람이 되고자 하는 소년 로봇에 관한 이야기로, 스탠리 스스로도 A.I. 대신 "피노키오 로봇 버전"이라 부를 정도로 피노키오의 직접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입니다.

초반에는 데이빗의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경계심과 기이함을 유지시키는 한편
그의 불투명한 정체성을 표현했습니다.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많은 사람들은 엔딩을 가리키며 스필버그 특유의 감성이 큐브릭의 작품을 망쳐놨다고 평했지만, 실제로 그 엔딩은 큐브릭이 기획 때부터 착안한 엔딩이지 스필버그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큐브릭 자신이 만들어낸 상상물이 자신의 감성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생존 당시 스필버그에게 감독직을 청했지만 스필버그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큐브릭을 기리며 그의 비전에 충실했던 나머지, 논픽션을 제외한 스필버그 영화 중 제일 어둡고, 제일 심도 있는 작품이라고 평해지기도 합니다.

이 영화를 간단하게 정의내린다면 스필버그의 말대로 바로 "인류의 종말"이겠지만 그리 단면적이진 않습니다.
물론 영화는 인류가 멸망한 미래에서 엔딩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 속에서 인류 고유의 성질인 humanity, 즉 인간성의 부재를 목격하게 되고, 결국 영화는 인류의 '물리적 멸망'이 일어나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우릴 우리로 만들어주는 인간성' 의 멸망도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식으로서 엄마인 모니카에게 쏟아붓는 인공지능 데이빗의 조건 없는 사랑은 순수하기 그지 없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영화에서 실제 사람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모습은 잔인합니다. 그들은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상대방을 도발하고, 사랑을 시험하기도 하며, 너무 사랑해서 상처 받은 나머지 사랑하는 상대를 죽이기도 합니다.
고통을 기억하며 손을 뿌리치는 로봇을 보며, 그리고 성관계를 위한 로봇을 얘기하며 품질 보증이 중요하다는 시덥잖은 농담을 들으며 박장대소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 데이빗을 둘러싸고 짖궂은 농담을 하는 아이들. 도망가는 로봇들을 붙잡아 잔인한 방식으로 부수며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그들이 로봇과 사람을 구분 짓는 요소라고 주장하는 우리의 "인간다운"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유일한 예외는 모니카입니다. 그녀만이 조건 없는 사랑을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인 데이빗에게도 베풀려 하고, 유일하게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동정을 베푸는 게 아닌 순수한 연민을 가지고 데이빗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정을 베풉니다.
부득이한 상황에 의해 데이빗을 버리며 모니카는 말합니다.
"I'm sorry I didn't tell you about the world. (이 세상에 대해 알려주지 못해 미안해)"
처음엔 이게 앞으로 데이빗이 직면하게 될 로봇을 향한 사람들의 차별과 학대로 이루어진 잔혹한 세상을 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더 나아가 이젠 일그러진 사랑으로만 가득한, 인간성이 잊혀진 현 사회의 차디찬 모습을 뜻하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의 변색된 사랑을 보며 순수했던 데이빗의 사랑도 조금씩 변해갑니다.
사랑의 어두운 단면을 보게 된 데이빗은 사람들처럼 사람 이외의 것들을 가짜라 칭하며 외면합니다. 마치 사람들이 데이빗의 조건 없는 사랑을 가짜라 치부하며 외면하듯, 데이빗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편이 되어주고 그를 보호하는 곰인형 테디를 가짜라고 말하며 장난감 인형으로만 대합니다. 어쩌면 로봇 중 제일 사람다운 모습을 갖춘 건 자신의 사랑을 시험하는 데이빗과 마틴 앞에서 둘 중 한 명을 차마 선택하지 못하고 망설임 끝에 모니카에게 달려간 테디일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영화 볼 땐 몰랐는데 저렇게 물 안에 홀로 남겨질 때도 테디는 옆에 있어주네요.)



영화내에서 데이빗은 원 안에 갇혀있는 모습이 종종 나옵니다.
천사 고리라는 해석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세상에 의한 데이빗의 배타 또는 고립으로 보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봤을 때 데이빗은 겉은 사람이지만 속은 그저 입력된 코드에 따라 반응하는 로봇인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데이빗이 도망다닐 때 마주친 여성 로봇이 데이빗을 사람으로 착각하고 돌봐주겠다고 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데이빗은 로봇들에게도 외형이 인간인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데이빗의 가치를 알아본 Flesh Fair의 직원이 말하듯 데이빗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고유한 존재 (one of a kind)" 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모니카를 향해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데이빗. 물론, 아니 당연하게도 이건 순수한 감정이 아니라 창시자에 의해 입력된 반응일 겁니다.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열면서 로봇 셰일라가 흘리는 눈물 한 방울.
그리고 자신의 창시자가 칭찬을 해주고 사람들의 갈채를 받자 기분 좋게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
바다 밑으로 떨어지는 데이빗을 보는 조의 얼굴에 눈물처럼 타고 흘러내리는 창문에 비춰진 데이빗의 조그만 모습.
화장을 고치는 모니카와 구별 안 되는 같은 모습으로 화장을 고치는 로봇 셰일라의 모습.
그리고 순전 데이빗의 꿈을 위해서 그를 도와주는 조의 모습.
결국은 로봇의 모든 행동들은 입력된대로 행동하는 것일 뿐이고 우리처럼 자의적인 모습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행동의 원인을 떠나서 이는 더 이상 우리들에게선 찾을 수 없는 인간다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잃어버린 우리 본연의 모습을 사람이 아닌 우리가 만들어낸 기계들의 인공적인 모습을 통해서 큐브릭과 스필버그는 보여줍니다. 
2000년 후 로봇들이 사람들이 가짜라 부르며 배척한 데이빗을 통해서 사람의 모습을 배우고 관찰하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참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A.I.는 어떤 뚜렷한 메세지를 전달하려는 영화는 아닙니다.
단지 스탠리 큐브릭이 현 세상에서 본 우리의 모습을 미래의 세계에 투영했을 뿐입니다.
인류가 실재적으로 멸종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큐브릭의 눈에는 우릴 우리로 만들어주는 humanity는 이미 자취를 감춘지 오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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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6-04-28 22:37:07

결말을 볼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린 기억밖에 없네요......제가 본 영화중에 제일 슬펐던


WR
2016-04-29 01:08:30

평생 남을 긴 여운을 남기는 영화에요. 아직도 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2016-04-28 22:47:03

정말 너무 좋아하는 영화에요 제 인생영화.. 초등학교때 처음봤는데 그때도 막연한 슬픔이 느껴지더라구요..
다시봐도 너무 슬프구요.
지금 사회에도 너무 어울리는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WR
2016-04-29 01:05:47

전 오랜만에 다시 본 작품인데 처음 봤을 때에 비해 너무나 많은 걸 느꼈습니다.

예전에 별로라고 생각했던 제 자신이 이해가 안 될 정도로요.
2016-04-28 23:14:35

좋은 리뷰는 닥추

WR
Updated at 2016-04-29 01:11:27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Updated at 2016-04-28 23:31:31

고리로 격리된 느낌의 신이 있었는지는 몰랐습니다. 굉장히 매력적인 장면들이네요. 전 로봇이 더 인간 같은 모습을 보이기에(데이빗을 포함하여) 인간성이 상실된(혹은 부족한) 인간과 인간성이 엿보이는 로봇을 대비시켜 보여준다고 생각했었죠. 여러모로 인간과 로봇, 진짜와 가상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는 영화였습니다. 

다른 거 다 떠나서 피노키오는 동화처럼 영화에서도 인간이 되는 것으로 끝낼 수는 없을 텐데, 인간이 되고 싶은 로봇은 과연 무슨 수로 결론을 맺을까? 이 궁금증이 끝까지 그 긴 시간을 몰입하게 해준 것 같습니다.(솔직히 후반부는 약간 늘어지는 느낌이었거든요) 정말 상상치도 못한 결말로 끝내줘서 좋았습니다. 이 결말의 매력 때문에라도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WR
2016-04-29 01:02:43

맞는 말씀입니다. 로봇의 행동들이 오히려 더 인간적이고 심지어 자의적으로 보이죠.

저도 엔딩이 동화책 마지막처럼 행복해 보이면서도 어두운 내면이 숨겨진 사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2016-04-28 23:35:04

인간이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영원'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추구를 바탕으로 종교도 생겨나고 신에 대한 믿음도 생겨났겠죠.

나이든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람보다는 돈을 더 믿습니다.

사람의 consistency라는 것이 생각보다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우리 옆에 영원히 존재하며 우리를 도와 줄 존재 - 인공지능의 탄생은

더 이상 사람이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WR
2016-04-29 00:58:35

가능성이 다분한 미래지만 개인적으론 그런 미래가 안 오길 소망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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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9 00:45:33

저는 정말 좋았네요. 이 영화. 원체 유명하긴 한 장면이지만, 주드 로 끌려올라가면서 말한 'I am, I was'가 인상에 많이 남더군요. 나중에 한번 혼자서 뜯어가면서 보고 싶은 영화.


그나저나 02년은 영화계에 있어 굉장히 풍요로운 한 해네요. 이거도 그렇고..
WR
2016-04-29 00:56:51

아, 저도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에 대해서 언급하려 했는데 깜빡하고 안 적었네요. 워낙 얘깃거리가 많아서 놓친 게 너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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