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이야기 - 우리나라의 미래가 염려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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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앞으로의 우리나라에 대해 가장 염려하는 부분은 갈등조정능력의 부재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사회갈등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통계로도 나타납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50년 동안 꾸준히 성장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나라는 여기서 더 올라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듭니다. 사회갈등을 예방하는 노력과 조정하는 능력이 없으면 우리는 여기서 멈추거나 주저앉을 수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제 글에서 미국사람은 부자를 미워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미국의 시스템이 공정하다고 믿고 있으며 능력 있고 열심히 일하면 성공의 기회가 온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으로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큼 부자와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불인정과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미국인이 자국의 시스템을 신뢰하는 데 반해서 우리 국민들은 한국의 시스템을 허점투성이로 여기며 불신합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들은 능력과 노력이 아니라 약한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해서였다고 믿습니다.
실제로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한창 산업화가 추진되었을 당시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대체로 특혜를 받았거나 내부정보를 얻었거나 줄서기를 통해 기회를 얻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열심히 일하며 성취동기가 높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이 정도를 밟지 않았다는 것에 분노합니다. 이렇듯 분노는 정당한 노력 없이 성공에 지위를 누리는 사람에게로 향하고,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회적 불신이 싹트게 됩니다.
매니아님들은 NBA 슈퍼스타들이 수천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것에 질투하거나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월한 능력으로 공정한 경쟁 시스템을 거쳐 그 자리에 오른 선수들인 걸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대학입학 수능제도에 찬성하지 않는 학부모들도 전국적으로 일시에 치르는 수능의 성적을 대학 입학 기준으로 적용하는 것에 승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자체가 국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공정한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수능 고득점 학생은 질투와 부정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속한 영역의 진입장벽을 철저히 높여놓습니다.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배타주의는 아주 유용하게 쓰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인사청문회에 모습을 나타내는 50대 후반의 장관 후보자들은 그 연배의 공직자 리더들 중에서 과거를 지내오면서 가장 흠결이 적은 부류에 속합니다. 그런 분들조차도 지금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들을 다반사로 해온 것을 확인한 젊은 세대들은 좌절하며 존경대신 조롱을 보냅니다. 우리나라에는 존경받을 만한 권위가 이미 사라졌습니다.
우리의 획일적인 사고는 사회가 갈수록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는 것을 잘 쫓아가지 못합니다. 저는 중학생 시절에 도덕수업을 참 싫어했습니다. 너무 재미없었기 때문입니다. 반공교육이 삼분의 일 쯤 차지했던 도덕 수업은 세상의 다양한 가치에 대한 획일적인 판단기준을 심어줬고 우리는 반복적인 시험을 통해 의심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우리에게는 철학이 없는 획일적인 도덕관념만 남아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한국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들의 가치 관념은 제가 느끼기에도 매우 경직되어 있습니다.
맹자의 오륜으로 대표되는 유교사상은 우리 생활에 여전히 뿌리 깊게 내려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30여년을 노력해서 부부유별을 차츰 극복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부유별 못지않게 우리에게 해악적인 장유유서는 시대가 지나면서 오히려 더욱 강화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처음 만나는 학생들끼리 재수, 빠른 년생 등등을 전부 참작해서 순식간에 자신들 간의 위계질서를 만드는 걸 보고 저는 깜짝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저의 선배 세대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장유유서는 권위주의적 문화 상하 위계적 문화를 존속시키는 가장 강력한 규범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가장 윗사람이 강력한 권위로 모든 중요한 결정을 하며 아래를 통제하는 시대에 살지 않습니다. 모든 중요한 결정은 우리 스스로의 몫으로 남습니다.
(이부분에 대해 약간 추가합니다. 사실 학생들이 순식간에 위계질서를 만드는 이유는 호칭문제가 가장 중요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고유한 '존대말' 사용은 필연적으로 장유유서를 없애기 힘든 요인입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재수생은 친구와 똑같이 불렀는데 요즘엔 재수생과 빠른년생도 칼같이 구별합니다. 위계적이라고 해도 학생들의 경우는 연장자가 막강한 권한을 갖는 건 아닙니다.)
저는 미국에서 교육받았고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서 획일적 도덕관념이 아닌 나 자신의 철학을 서서히 만들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미국을 비롯한 서양 시스템 중에 많이 놀랐던 것이 배심원 제도입니다. 미국은 모든 중요한 사법적 사건에서 무작위로 차출한 일반 국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만장일치로 유무죄를 평결합니다. 다수결이 아니라 만장일치입니다. 이런 제도가 현재까지 무리 없이 지속될 수 있는 이유는 일반인들도 열린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끄는 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무작위 집단이 순수하게 그들의 힘으로 참여자 모두가 납득할만한 합의에 도달하는 건 우리나라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열린 토론으로 합의를 이끄는 방식의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토론으로도 자신의 기존 생각을 바꾸지 않고 의사결정은 대부분 과반수 표결입니다. 열린 대화 속에서 자신이 내놓은 의견보다 더 나은 의견이 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자체로 훌륭한 능력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대화자 각각의 생각이 협력적 사유의 과정이 될 수 있도록 능동적이면서 배타적이지 않은 대화능력의 배양은 우리나라 교육이 갖추지 못한 아쉬운 점입니다.
우리나라는 적지 않은 희생을 치르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획득했습니다. 하지만 사회, 경제적인 민주주의와는 여전히 큰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정부의 권위도 예전보다 많이 약해져서 민간부문의 갈등에 함부로 개입하기 쉽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계층갈등, 이익집단갈등, 노사갈등, 정책갈등, 세대갈등, 이념갈등, 지역갈등, 환경갈등, 입지갈등, 성별갈등, 문화갈등 등 각종 사회갈등이 점차로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의약갈등과 최근의 사시존치갈등처럼 찬성과 반대 측이 관련된 인맥 등 온갖 세력을 동원하는 총력전의 양상도 자주 나타납니다.
근래에 이익과 관련된 사회갈등을 생각나는 대로 열거하면 한약조제권 분쟁, 대학등록금 반값 투쟁, 골목상권 SSM 분쟁, 서울시 뉴타운 출구정책 갈등, 방폐장 건설부지 선정, 의약품 편의점 판매 분쟁, 용산재개발 갈등 등이 떠오르고 가치와 관련된 갈등으로는 서울시 무상급식, KTX 민영화, 평택 주한미군기지 이전, 시화호 개발, 평창 가리왕산 스키장 건설, 밀양 송전로 건설 등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앞으로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사회갈등들이 여기저기서 우리나라의 발전지표를 늦출 거라는 데 핵심이 있습니다.
가치관이 다양해지는 민주화 정착 시대에 사회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합니다. 실제로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시끄러운 본성이 있습니다. 문제는 갈수록 많아지는 갈등에 대한 조정장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껏 갈등은 표면화되기 전까지 갈등 당사자 상호 간 회피하고 무시하는 형태로 진행되어온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새만금 간척사례, 천성산 고속철도개발사례, 행정중심 복합도시건설사례처럼 법원의 판결을 거쳐 헌법재판소의 헌법소원으로 갈등을 해결하기에는 그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갈등을 조정해 줄 존경받는 권위가 없으며, 자신들의 입장만을 생각하는 획일적이고 좁은 당사자들의 식견 그리고 열린 대화 속에서 공동의 합의를 이끌어내어 갈등을 예방하거나 해소하는 능력의 부재로 인해 갈등조정의 길은 멀고도 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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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존경받을 만한 권위가 이미 사라졌습니다." 이 부분 왜 이렇게 공감가면서 슬픈지요..